아프가니스탄의 친미(親美) 정권을 무너뜨리고 20년 만에 권력을 되찾은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탈레반의 ‘새 정부 구성’을 위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미군을 피해 아프간을 떠났던 탈레반 주축 인물들도 ‘개선장군’ 모습으로 수도 카불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서구와는 다른, ‘탈레반식 민주주의’를 천명한 탈레반은 수주 안에 새로운 정부의 얼개를 공개할 방침이다. 정부 수립에 발맞춰 내부 단속도 강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탈레반 창설자 중 한 명이자 최고 정치 지도자인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는 21일(현지시간) 카불에 입성했다. 탈레반의 카불 점령 6일 만이다. ‘은둔형’인 최고 종교 지도자 하이바툴라 아쿤드자다에 이어 ‘탈레반 2인자’인 바라다르가 카불에 도착했다는 건 새 정부 수립에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겠다는 의사 표시인 것으로 해석된다.
아울러 지난 16일엔 탈레반 창설자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의 아들이자 탈레반 군사 작전을 총괄하는 물라 무하마드 아쿠브가 카불로 복귀했다. 탈레반 내 정치ㆍ군사 지도자가 한자리에 모이게 된 셈이다. 이에 더해 테러조직 알카에다 지원 혐의로 미국의 수배자 명단에 오른 칼릴 알라흐만 하카니도 19일 카불 최대 이슬람 사원에서 환대를 받는 모습이 포착됐다.
‘탈레반 정권 출범’은 늦어도 다음 달 중 가능할 듯하다. 익명을 요구한 탈레반 관계자는 이날 로이터통신에 “법률, 종교, 외교 정책 전문가들이 앞으로 몇 주 내에 새 정부 틀을 공개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서구에서 정의하는 민주주의는 아니겠지만,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호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탈레반 정권의 밑그림이 어느 정도 그려졌다는 의미다.
내부 단속도 한창이다. 이날 탈레반은 기존 정부에서 일한 공무원들의 출근을 금지했다. 지난 17일엔 공무원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에게 ‘업무 복귀’를 촉구했으나, 불과 나흘 만에 뒤집은 꼴이다. AFP통신은 “사무실 문 앞을 지키던 탈레반이 ‘정부청사를 열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 업무 재개 시점을 알려면 TV나 라디오를 참고하라’고 했다” “탈레반이 ‘신임 장관 등이 임명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등 공무원들의 전언을 전했다.
이른바 ‘구체제’ 인사한테도 탈레반의 손길이 뻗치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탈레반을 피해 망명길에 오른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의 친동생 하슈마트 가니가 탈레반에 ‘충성 맹세’를 했다는 글이 돌았다. SNS에 유포된 동영상을 보면, 하카니 등 한 무리의 남성들이 서로 손을 모으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데 이 자리에 하슈마트도 참석했다는 이야기다. 다만 하슈마트로 지목된 동영상 속 인물이 실제 그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가니 대통령 및 가족은 아무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국제사회는 탈레반이 ‘국가의 외형’을 갖추고 있는 데 대해 엇갈린 반응이다. 유럽연합(EU)은 탈레반을 합법정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날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탈레반과 접촉 중인가’라는 취재진 질문에 “우리는 이 위기의 순간에 운영상의 접촉을 하고는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이 접촉은) 정치적 대화와 분리돼 있다”며 “탈레반과 정치적 대화는 없고, 탈레반에 대한 인정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반면 러시아는 터키와 손을 잡고 탈레반과의 대화에 나설 전망이다.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은 크렘린궁이 이날 성명을 내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통화에서 아프간 문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두 정상은 그간 탈레반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