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힙스터 직장인이 공구 전도사 된 사연은

입력
2021.08.1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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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 큐레이션 업체 '공구로운 생활'  정재영 대표

2017년 추석, 아버지가 쓰러졌다. 당장 공구상으로 일하던 아버지의 거래처들로부터 납품 문의가 쏟아졌다. 공구상 없이는 산업 생태계도 굴러갈 수 없었다.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성수동에서 코워킹 스페이스 매니저로 일하고 있던 아들은 그렇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구상’의 길을 걷게 된다.

15년간 아버지가 타고 다녔던 트럭의 주행거리가 43만㎞에서 53만㎞가 될 때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새벽 5~6시에 일어나 건설 현장으로 나가는 기술자들의 공구를 챙겨주기 위해 집을 나섰고, 몸으로 부딪치며 일을 배워나갔다. 트럭도 운전할 줄 모르던 ‘병아리 공구상’은 그렇게 아버지의 공구상사를 공구 큐레이션 업체 ‘공구로운 생활’로 키워낸 어엿한 CEO가 됐다. 9일 전화로 만난 정재영 ‘공구로운 생활’ 대표는 “건강한 공구 생태계를 꾸리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고민할 겨를도 없이 바로 일에 투입됐어요. 난생 처음 트럭을 운전해서 거래처를 돌아다니며 공구를 납품했죠. 시화 단지에 가면 정말 공장밖에 없어요. 제가 원래 일하던 성수동과는 전혀 딴판이죠.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어서 괴리감을 느꼈어요. 그러다 문득 내가 가진 능력을 공구 생태계랑 융합시켜 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공구상이 되기 전에는 그래픽디자인 브랜드를 기획하고 스타트업 창업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가장 첨단을 달리는 업종에서 가장 오래된 업종으로 한순간 옮겨가야 했던 정 대표는 이를 접목시켜 보기로 했다. 공구 및 산업용품 정보를 소비자에게 알려주는 콘텐츠를 만들어 보기로 하고 공구상의 일상을 담은 글을 브런치에 연재했고 책으로도 엮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 ‘오늘부터 공구로운 생활’은 가업을 잇기 위해 낯선 산업용품 세계에 뛰어든 ‘청년 공구상’의 좌충우돌 성장기다. 자신을 먹이고 기른 자원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었던 ‘공구’의 세계를 소비자의 입장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간 기록이다.

책은 공구상 성장일지를 담은 에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끼, 톱, 그라인더 같은 전문 공구부터 귀마개, 가위, 줄자 같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구를 총망라해 세심한 해설을 곁들인 사용설명서기도 하다. 특히 요즘처럼 DIY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때 모든 집에서 하나씩 구비해두면 좋을 책이다. 정 대표는 “집뿐만 아니라 자영업에서도 직접 수리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과거에는 공구가 산업 현장을 중심으로 한 제품이었다면 최근에는 디자인과 브랜딩 역시 다양한 대중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다양한 공구 중에서도 ‘이것만은 꼭 구비해야 할’ 공구는 무엇일까? 정 대표는 ‘전동 드라이버’ 그리고 ‘다목적 가위’를 꼽았다. 가구를 조립할 때 전동 드라이버는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고, 일명 원예가위로도 불리는 다목적 가위는 나무뿐 아니라 전선 등 모든 절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유용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어쩔 수 없이 물려받은 고장 난 물건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고칠 수 있는 살림”이라고 말하는 정 대표에게, 산업용품은 ‘가능성’이다. 그의 꿈은 “공구가, 산업용품이 누구에게나 친숙한 세상”이다.

“공구가 생긴 이유는 인간이 좀 더 효율적으로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내가 힘이 약하니까, 어려우니까, 공구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게 바로 공구니까요."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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