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 민간에도 적용? 뿔난 농어민들 "농축수산물 선물액은 상시 상향해야"

입력
2021.08.1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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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선물 권고안 논의하려던 13일 회의 연기
'민간인판 김영란법' 적용에 농축수산업계 크게 반발
"명절 때마다 김영란법 농축수산물 선물가액 높여야"

다음 달 추석부터 이른바 ‘청렴선물 권고안’을 시행하려던 국민권익위원회가 한 발 물러섰다.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 적용 대상을 민간까지 확대하려는 취지의 권고안을 두고, 농축수산업계의 거센 반발과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라는 비판이 쏟아지자 입장을 바꾼 것이다. 농어축산민들은 한발 더 나아가 "김영란법의 선물가액 기준을 상시적으로 높여 국산 농축수산물 소비를 촉진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권익위, 추석 시행 예정이던 청렴선물 권고안 '보류'

10일 정부 등에 따르면, 권익위는 오는 13일 청렴사회민관협의회에서 청렴선물 권고안을 상정‧논의하려던 기존 계획을 뒤로 미뤘다. 권익위는 논의 결과를 국무회의에 보고한 뒤, 내달 추석부터 시행할 방침이었다. 권익위 관계자는 “각계 의견을 수렴할 필요성이 있어 일정을 연기했다”며 “청렴사회민관협의회를 언제 다시 개최할지는 아직 정해진 바 없다”고 말했다.

권익위가 추진한 청렴선물 권고안은 ‘민간에도 적용되는 김영란법’이다. 공직사회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만든 김영란법을 민간에도 동일하게 적용하겠다는 게 골자다.

공공 부문에 이어 민간에서도 이해관계자끼리 과도한 선물을 주고받지 않으면 청렴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마련됐다. 김영란법은 직무관련성이 있는 경우 △음식 3만 원 △선물 5만 원(농축수산물은 10만 원) △축‧조의금 5만 원 이상 받을 수 없게 하고 있다.

권익위는 “청렴선물 권고안은 법적 강제성이나 제재가 따르지 않는 윤리강령”이라고 설명하지만, 현장에선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다. 권고안이 사실상 ‘민간의 선물가액 규정’으로 여겨져 농축수산물 소비를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상당하다.

한국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는 성명을 내고 “국내 농축수산물 시장 개방과 기후변화, 부족한 인력으로 삼중고를 겪는 농어축산민을 벼랑으로 내모는 처사”라며 “규제와 다름없는 선물가액 기준이 민간까지 확대되면 농축수산물 거래량‧매출액 감소는 불가피하다”고 비판했다.

청렴선물 권고안 대상이 되는 민간 이해관계자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 것도 논란을 키우는 부분이다. 권익위가 마련한 권고안엔 ‘민간 영역의 이해관계자 사이에 적용할 수 있다’고 돼 있을 뿐, 어디까지를 이해관계자로 볼지는 나와 있지 않다. 최범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조정실장은 “이해관계자 범위가 포괄적이다 보니 사실상 민간의 대다수 농축수산물 선물 거래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과거에도 선물가액이 지정될 때마다 국산 농축수산업계는 큰 타격을 받아왔다. 김영란법 시행 후 첫 명절이던 2017년 추석의 신선식품 매출은 직전 명절 대비 22%나 줄었다. 축산식품과 과일 역시 각각 24.5%, 20.2% 감소했다.

꽃다발 3만 원, 화환은 5만 원을 넘지 못하게 한 공무원행동강령이 도입된 2003년엔 화훼산업 매출이 25% 급감하기도 했다.

"명절 농축수산물 선물액 20만 원으로 계속 높여야"

농축수산업계에선 차제에 김영란법을 수정해, 명절 때마다 반복되는 농축수산물 선물가액 논란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명절 대목에 기댈 수밖에 없는 열악한 농축수산물 소비 현실을 감안, 한시적으로 허용해 온 선물가액 상향을 아예 상시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익위는 농축수산업계의 요구를 반영해 지난해 추석과 올해 설에 일시적으로 김영란법의 농축수산물 선물가액을 10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높였다. 그 결과 지난해 추석 때 10만~20만 원의 농축수산식품 선물 매출액은 전년 추석보다 30.45% 급증했다. 다만 이번 추석에도 농축수산물 선물가액을 상향 조정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최 실장은 “한우‧과일‧홍삼 등 국내산 농축수산물은 명절 기간에 선물용으로 소비가 많이 된다”며 “이 같은 특성을 반영, 명절 농축수산물에 한해 김영란법의 선물가액을 높이면 별도의 사회적 비용 없이 국내 농축수산물의 소비가 늘어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권도 힘을 보태고 있다. 이날 송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명절 기간에는 김영란법의 농축수산품 선물 가액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재 국회에는 명절 등 특정 기간 농축수산물 선물가액 상향을 정례화하거나 농축수산물을 청탁금지법 대상에서 제외하는 법안이 3건 발의된 상태다.

세종= 변태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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