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감독 겸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잘 아실 겁니다. 올해 91세인 이 노장은 ‘황야의 무법자’(1961) 등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무법자 3부작’에 출연하며 세계적인 스타가 됐습니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범죄자를 처단하는 열혈 형사 해리(영화 ‘더티 해리’ 시리즈’)로도 유명합니다.
이스트우드는 1971년 스릴러 ‘어둠 속에서 벨이 울릴 때’로 연출에 도전한 후 명장으로 거듭났습니다. 그가 연기와 연출을 겸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는 제77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1942~2013)는 한 인터뷰에서 “이스트우드는 내 예상을 가장 크게 뛰어넘는 성취를 이룬 영화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이스트우드는 할리우드에서는 드물게도 공화당 지지자입니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공화당 정책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여느 공화당 지지자들과 달리 낙태 합법화와 총기 규제 강화, 동성결혼 합법화를 주장합니다. 인품과 정책에 따라 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행보도 보여왔습니다. 지난해 미국 대선 때는 민주당 마이클 블룸버그 후보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진정한 보수라는 수식이 따릅니다.
이스트우드는 영화로 자신의 생각을 곧잘 표현해 왔습니다. 가부장적이면서도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고 약자를 포옹하려는 인식이 스크린에 반영됐습니다. 정파가 아닌, 가치로서의 보수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아버지의 깃발’(2006)과 ‘아메리칸 스나이퍼’(2014)가 대표적입니다.
미국 체조선수 수니리가 최근 2020 도쿄올림픽 기계체조 개인종합에서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보면서 이스트우드를 떠올렸습니다. 수니리는 미국 내 소수민족 몽족 출신입니다. 한국인에게는 조금 낯선 민족입니다. 이스트우드가 주연ㆍ연출한 영화 ‘그랜 토리노’(2008)에 등장합니다. 이 영화를 보시면 몽족의 생활 방식과 더불어 미국의 가치가 진정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아챌 수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입니다. 이제 막 아내 장례식을 치른 월트는 성격이 고약한 인종주의자입니다. “1950년대 사고방식을 지닌” 그는 모든 게 못마땅합니다. 장례식에 배꼽티를 입고 온 손녀를 보고 부아가 치밀어 육두문자를 입에 올립니다.
6ㆍ25전쟁 참전 용사인 데다 포드 공장에서 일했던 월트는 애국심이 남다릅니다. 집 현관에는 항상 성조기가 걸려 있습니다. 그는 일본 차를 모는 큰아들에게 “미국 차를 타고 다니면 어디 덧나나?”라고 힐난하기도 합니다. 성질이 모난 데다 생각을 직설적으로 내뱉으니 가족들이 좋아할 리 없습니다. 두 아들이 각자 가족을 이루고 있는데 추수감사절에도 모이지 않습니다.
월트가 가장 못마땅한 건 이웃입니다. 그가 사는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는 전형적인 러스트 벨트(Rust Belt)입니다. 한때 자동차 제조업으로 흥하였으나, 미국 자동차산업이 몰락하면서 퇴락한 곳입니다. 월트의 집 주변 낡은 집들은 가난한 동양인 차지입니다. 인종주의자인 월트로선 우르르 몰려다니고, 앞마당 잔디를 깎지 않는 낯선 이웃이 그저 미울 뿐입니다. 미국이 미국답지 않아지게 한 원흉이라는 생각에 이웃을 보면 “저런 야만인들”이라고 욕하고, 얼굴 구기기 바쁩니다.
월트의 이웃인 몽족 소년 타오(비 방)는 갱단 두목인 사촌 형의 협박에 시달립니다. 어느 날 사촌 형의 강요로 월트의 집에 침입합니다. 월트가 애지중지하는 72년산 스포츠카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고 했는데, 월트에게 들켜 도망칩니다. 타오의 누나 수(아니 허)는 동생을 데리고 월트를 찾아와 사과합니다. 월트는 이웃과 담쌓고 살려고 했으나 강제로 교류를 하게 된 셈입니다.
월트는 위험에 빠진 수를 우연하게 구해준 후 차에서 오래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수는 자신이 베트남전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도와줬다가 고향을 떠나야 했던 몽족의 후예라고 짧게 소개합니다. 그의 말에는 월트의 무지에 대한 분노가 섞여있습니다.
몽족은 베트남 북부와 라오스 국경지대 산간지역에 많이 거주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베트남의 침범을 많이 당해 베트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CIA는 국가 설립을 미끼로 몽족을 꼬드겨 게릴라 활동에 나서도록 했습니다. 베트남전 당시 북부는 월맹의 최후방이었습니다. 월맹으로선 몽족 게릴라가 꽤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월맹이 베트남 통일에 성공하고, 라오스까지 공산화되면서 몽족은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많은 몽족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태국 등으로 흩어졌습니다. 일부는 CIA의 도움으로 미국에 정착하기도 했지만 외면 받은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몽족의 신산한 현대사에 미국의 책임이 컸던 셈입니다. 디아스포라로 미국에서 살게 된 수는 자신을 향한 월트의 인종주의에 더욱 분노를 느끼고 서운해 할 수 밖에 없을 듯합니다.
월트는 수, 타오와 교류하며 조금씩 깨달음을 얻어갑니다. 자신이 얼마나 주변과 벽을 치고 살았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호시탐탐 자신의 재산을 노리는 혈육보다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동양인 이웃에 더 마음을 열게 됩니다.
월트는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한반도 남부의 자유를 지켜냈던 전쟁에 참전한 과거를 자랑스러워 하는 듯합니다. 전장에서 사람을 죽인 후 냉소적인 무신론자가 된 듯하지만 그는 무공훈장 등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흔치 않은 저녁 외출도 참전 용사들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자유라는 미국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월트가 인식하지 못했던 미국의 특징이자 강점은 인종다양성입니다. 그는 성에서 알 수 있듯 폴란드계입니다. 월트가 욕을 하며 친근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이발사는 이탈리아계입니다. 부탁을 위해 찾아간 건설현장 소장은 아일랜드계입니다. 그들의 조상은 각자 고향을 떠나 미국이라는 낯선 곳에 정착했고, 그들의 후손들은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죠.
월트는 미국에서 살고 미국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몽족이든 그 어느 민족이든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깨닫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경멸했던 몽족 소년과 소녀의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월트는 가족과 불화했던 후회스러운 삶을 참회할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자신의 몸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기에 누군가를 위한 의미 있는 최후를 준비하고 싶기도 합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건너 뛰시려면 ☞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월트는 죽은 뒤에 유언장을 통해 자신이 가장 아끼던 물건인 그랜 토리노를 타오에게 물려줍니다. 죽기 전엔 무공훈장을 타오의 가슴에 달아주기도 합니다.
그랜 토리노는 미국적 가치이자 자부심을 상징합니다. 자동차산업은 미국이 세계 공장이라 불렸던 시절, 미국 제조업을 떠받치던 주요 축이었습니다. 월트는 영광의 시절을 함께 했던 추억을 그랜 토리노에서 찾습니다. 그랜 토리노는 후대에게 넘겨줘야 할 주요 유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참전으로 받은 훈장을 타오에게 달아주는 것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월트가 타오에게 애장품을 넘기는 모습은 미국적 가치가 인종이 아닌, 정신에 있다는 걸 상징하는 대목입니다.
☞열린 보수주의자 이스트우드가 도쿄올림픽 여자 기계체조 개인종합 경기를 봤다면 아마 흐뭇한 미소를 짓지 않았을까요. 수니사 리의 활약상이 그가 영화를 통해 바랐던 몽족의 미래, 미국의 미래였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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