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커서 클라이밍 힘들 것'… 서채현, 편견 딛고 대견한 8위

입력
2021.08.06 22:17

“도쿄 올림픽요? 가면 좋겠지만, 못 가도 상관없어요. 자연 암벽 타러 가면 되죠” (2019년 10월 한국일보 인터뷰 중)

인공 암벽보다 자연 바위가 더 좋다던 ‘쿨’한 18세 여고생이 ‘클라이밍 최초의 올림픽’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하며 다음 올림픽에서의 기대치를 올렸다.

서채현(18ㆍ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은 6일 일본 도쿄의 아오미 어반 스포츠파크에서 2020도쿄올림픽 스포츠클라이밍 여자 결선에서 8위로 경기를 마쳤다. 약점인 스피드에서 결선 최하위인 8위로 출발했고 볼더링(7위)에서도 고전하면서 중간 성적까지도 8위에 머물렀다. 주종목인 리드에서 35개의 홀드를 잡으며 2위를 차지했지만 최종 성적을 끌어올리진 못했다. 홀드를 하나만 더 잡았더라도 동메달을 다툴 수 있었는데 막판에 잡은 홀드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래도 스피드에서 자신의 종전 최고기록을 깬 데다 경기 끝까지 리드 강세를 이어간 것은 유의미한 결과였다. 첫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올림픽에서 결선에 진출한 것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인 ‘흔들리지 않는 멘털’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는 “(성인무대 데뷔전이었던) 2019 월드컵 첫 경기에선 엄청 긴장됐는데, 이후론 하나도 안 떨렸다”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벽을 오를 뿐”이라고 했다.

스피드에 약점을 보였지만,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슬로베니아의 클라이밍 여제 얀야 가른브렛(22)이나 노구치 아키요(32) 등 세계 정상급 선수들에 비해 어리다보니 근육이 완전히 발달하지 못했는데, 스피드는 근력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종목이다. 게다가 ‘정해진 루트를 빨리 오르라’고 강요하는 스피드는 자유분방한 여고생 서채현에겐 따분한 종목일 수밖에 없다. 서채현 역시 “스피드는 정말 재미없는 노동”이라고 고개를 젓기도 했다.

아버지 서종국(48), 어머니 전소영(48)씨 모두 클라이머다. 어린 외동딸을 집에 혼자 둘 수 없어서 서채현이 6살 때부터 같이 산행을 다녔다. 서채현이 자연스레 ‘자연 암벽’과 친해진 이유다. 또 부모가 서울에서 인공 암장을 운영 중이라, 금세 인공 암벽과 친구가 됐다. 아버지를 따라다녔던 빙벽 등반도 수준급이다.

서채현은 ‘천재형’이라기보단 후천적인 ‘노력형’ 선수다. 몸집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인데, 이런 체형은 가파른 벽을 올라야 하는 클라이밍에 불리하다. 어머니 전씨는 “채현이가 어렸을 때, 한 지인은 ‘머리가 커서 클라이밍으론 (성공하기) 힘들겠다. 차라리 공부를 시켜라’고까지 했다”고 전했다. 서채현은 그러나 이런 주변의 편견을 깨고 올림픽 결선까지 오른 것이다. 방과 후 6~7시간씩 암장에서 씨름하면서 루트 파악(오르는 길 찾기)에 눈을 떴다고 한다. 또 “그냥 클라이밍이 재미있어서 즐긴다”는 ‘덕업일치’도 크게 작용했고 아버지의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도 한몫했다.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도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막판에야 올림픽 출전 티켓을 잡았다. 출전권 20장(여자) 가운데 2019년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 예선에서 14명이 결정됐는데, 한국은 한 장의 티켓도 잡지 못했다. 나머지 6장은 대륙별 선수권대회를 통해 결정되는데 코로나19 여파로 대회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결국 세계랭킹 순으로 티켓을 받았는데 서채현(13위)이 행운의 주인공이 됐다. 또 국제 대회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2019년 11월 아시아선수권대회 이후 1년 반이 넘도록 국제대회에 참가하지 못해 대회 출전 감각이 매우 떨어진 상태였기에 ‘올림픽에서 제대로 된 경기력이 나오겠느냐’는 우려도 나왔다. 반면, 경쟁자들은 유럽에서 개최된 대회에 꾸준히 참가했다.

서채현의 눈은 이제 2024년 파리올림픽을 향한다. IOC집행위원회 결의에 따라 스포츠클라이밍은 파리올림픽에서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데다 세부 종목도 스피드와 콤바인(리드+볼더링)으로 나뉘면서 메달 개수도 2배로 늘었다. 출전 선수도 남녀 40명에서 68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강주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