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은 그런 ‘어깨’ 같은 소설이다. 안간힘은 잠시 내려놓고, 힘들 땐 기대라고 소설의 한쪽 어깨를 내어준다. ‘쇼코의 미소’와 ‘내게 무해한 사람’ 단 두 권의 소설집만으로 지금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화자인 지연이 이혼 후 서울을 떠나 바닷가 근처 작은 마을 희령으로 도망치듯 향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곳에서 지연은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외)할머니와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이후 지연은 할머니로부터 할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외할머니로 이어지는 모계의 삶을 전해 들으며 마음의 상처를 조금씩 회복해 나간다.
나(지연)·엄마·할머니·증조모로 이어지는 여성 4대의 신산한 삶을 통해 슬픔과, “그 슬픔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더 큰 슬픔의 힘”(오정희)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 힘은 다름 아닌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조건 없이 건네는 우정과 사랑에서 비롯한다. 작가의 전작에서도 꾸준히 돋보였던 여성들의 우애가 이번 소설에서는 시대와, 세대를 넘나들며 빛을 발한다.
27일 한국일보에서 만난 최 작가는 “나 역시 힘들 때 친구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여성들의 관계를 폄하하는 말들에 대해,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에서 ‘남편’들은 외도를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거나, 평생 자신밖에 모르거나, 과거를 속이고도 사과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피란 등 고단한 삶의 굽이를 통과하는데 이런 남편들보다 더 힘이 되는 것은 서로를 '귀애'하고 '애지중지'하는 여성들이다. 증조모 삼천에게는 평생의 벗인 새비가 있었고, 할머니 영옥에게는 오래도록 그리워한 희자가 있었다. 지연의 엄마에게도, 지연에게도 비로소 나다운 모습으로 울 수 있게 하는 친구들이 있다.
때문에 가족 역시 한결같이 그곳에 있기에 언제든 어리광부려도 되는 사이가 아니라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신중하게 우정을 쌓아나가야 하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이 같은 관계 설정은 “오히려 평생을 남으로 살아왔으므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나에게 자기 엄마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한다.
“가족일수록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의 얘기를 더 주의 깊게 듣게 되기도 하죠. 다시는 안 볼 사이고, 남이면 더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으니까요. 지연이와 할머니의 관계 역시 그런 거리감 사이에서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앞선 여성들로부터 지금의 실연을 이겨낼 힘을 얻어내고 그들의 용기와 유쾌함을 배우는 것은 현실도 마찬가지다. 극중 휴대폰 게임 캔디 크러시 고수에 총명하고 명랑한 할머니 캐릭터는 실제 최 작가 할머니인 92세 정용찬 여사에게서 따왔다.
“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는데, 팩게임 봄버맨 50탄을 다 깼을 정도로 게이머세요. 소설 속 할머니처럼 어린 저를 온갖 곳에 데리고 다니셨어요. 그런 할머니는 어렸을 때 어떻게 사셨을까, 그 궁금증에서부터 소설이 출발했어요. 실제 할머니에게 들은 얘기가 많이 담겼죠. 전쟁과 피란에 대한 묘사는 박경리, 박완서 선생님 글을 많이 참조했고요.”
첫 책으로 큰 주목을 받은 뒤 낸 두 번째 책은 부담이었다. 하지만 첫 장편은 그저 “책이 자신의 운명대로 자유롭게 살았으면” 싶다. 대신 책이 향하는 방향이 “외로운 사람의 곁”이길 작가는 바랐다. "지연이가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위로받고 변화하듯이, 이 책이 독자들에게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