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화 말라” 말폭탄 쏟아낸 中, 美에 청구서도 떠넘겼다

입력
2021.07.26 21:36
[中 셰펑, 美 셔먼과 톈진서 차관급 회담]
美에 '적, 속임수, 악마' 등 원색 비난 봇물
中 작심 발언만 실시간 공개, 선전 극대화
'유학생 비자 제한 철폐' 요구 리스트 압박


중국이 26일 미국을 향해 말폭탄을 쏟아냈다. 적, 속임수, 악마 등 온갖 험악한 표현이 등장했다.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을 톈진으로 불러들인 자리에서다. 양국이 10월 대면 정상회의를 목표로 고위급 채널을 다시 가동했지만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셰펑 부부장(차관)은 이날 셔먼 부장관과 회담에서 “미중 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져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일부 미국인들이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삼은 것이 근본 원인”이라고 일갈했다. 이어 “미국은 중국을 2차 대전 당시 일본, 냉전시절 소련으로 여긴다”면서 “중국을 악마화해서 국내 불만을 무마하고 미국의 구조적 모순을 중국 탓으로 돌리려 한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또 “미국은 잘못된 생각과 위험한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촉구했다.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중국을 방문한 최고위급 각료를 상대로 분풀이하듯 융단폭격을 가한 셈이다.

셰 부부장은 미국이 강조하는 경쟁, 협력, 대항의 3분법은 “중국을 억압하는 속임수”라며 “대결과 억제가 본질이고 협력은 미봉책, 경쟁은 말의 함정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중국에 필요로 할 경우에만 협력을 요구하고, 미국이 우위에 서면 공급을 끊고 봉쇄와 제재에 나서면서 중국을 억제하기 위해 온갖 충돌을 불사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미국은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으려 한다”면서 “나쁜 짓을 하면서 좋은 결과를 얻으려 한다면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미국은 악당, 중국은 선의의 피해자라는 뉘앙스다.

셰 부부장은 미국의 인권문제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신장위구르 인권탄압 지적에 반박하기 위해서다. 그는 “미국은 과거 원주민을 말살했고 현재는 전염병으로 6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면서 “대체 무슨 근거로 전 세계 민주인권 대변인을 자처하는가”라고 되물었다. 아울러 “중국을 상대로 이래라저래라 말할 자격이 없다”며 “중국인의 정부에 대한 만족도는 90%를 넘는다”고 강변했다.

이날 회담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언급하기는 했다. 다만 “미국은 반드시 중국과 마주보고 행동해야 한다”면서 “상호존중과 공정한 경쟁, 평화공존으로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 손을 내밀면서도 패권주의와 일방주의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나 다름없는 대목이다.


중국 외교부는 이날 셰펑 부부장의 작심 발언을 이례적으로 실시간 공개했다. 분이 덜 풀렸는지 셰 부부장은 회담 후에도 중국 기자들과 만나 “레드라인을 침범하고 불장난으로 도발하는 것을 중단하라”며 미국을 몰아세웠다.

그는 특히 “미국이 이행해야 하는 개선사항과 중국이 중점적으로 관심을 갖는 사안을 담은 리스트 두 가지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개선요구사항에는 △공산당원과 가족, 중국 유학생에 대한 비자 제한 철폐 △중국 관료, 기관에 대한 제재 해제 △공자학원, 중국 기업에 대한 탄압 중단 △중국 매체를 외국 사절단으로 등록하는 결정 취소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의 미국 송환 요구 중단이 담겼다. 최근 수년간 미중 갈등을 증폭시킨 핵심 현안이 총망라된 셈이다.

중점사안에는 △미국 거주 중국 국민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중국 대사관·영사관에 대한 괴롭힘 △반아시아 감정과 반중 감정의 부상 △중국인에 대한 폭력 등을 거론하며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

이처럼 중국 입장은 장황하게 공개한 반면 회담 상대인 셔먼 부장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 사이 일방적으로 미국을 공격한 중국의 항전의지를 과시하며 선전 효과를 극대화했다. 다만 셰 부부장의 입을 빌어 “미국은 기후변화, 이란과 한반도 핵 문제 등에서 중국의 협력과 지지를 요청했다”고 짤막하게 전하는데 그쳤다.

베이징= 김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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