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평을 층층이 쌓아 올린 집. 서울 종로구 창신동 한양도성길, 성벽 옆에 자리한 '세로로(대지면적 33.7㎡, 연면적 66.7㎡)'는 작은 집이다. 최민욱(41) 스몰러 건축사사무소 소장이 자신의 신혼집을 직접 지었다. 부동산 시장이 한창 과열되던 시기, 부부는 이 경쟁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집 짓기를 선택했다. 최 소장은 "자산 가치를 떠나서 우리와 맞는 집을 짓는 게 중요했다"며 "부동산 시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했다.
최 소장은 이 집에서 와인 전문가인 아내, 고양이 두 마리와 2년째 살고 있다. 지금이야 주민들이 건물의 하얀 외벽을 두고 '창신동 백악관'이라고 부를 정도로 동네의 랜드마크가 됐지만 원래는 누구도 새 건물이 들어선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던 자리였다. 부동산도 처음에는 "땅이 있긴 있는데 거기는 집을 못 짓는다"고 단언했었다.
1930년대 지어진 옛 집은 쓰레기가 쌓인 채 방치돼 있었다. 무엇보다 집 짓기에는 너무 작은 자투리 땅이었다. 지인들도 "미쳤다"며 만류했다. 아무리 건축가라도 집 짓기는 큰 결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 역시 '5평에 살 수 있을까' 걱정됐지만, 고민 끝에 부부는 결국 집 짓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다.
"역세권은 비싸니까 좀 더 멀리 보자, 서울은 비싸니까 경기도로 보자, 집을 이렇게 물건 고르듯이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파트는 평면도 다 똑같고요. 예산에 맞추는 거지, 사실 선택지가 없는 거잖아요. (최민욱)" 부부는 선택지에 없는 답을 직접 찾기로 했다.
부동산으로 자산을 불리는 끝없는 경쟁에 동참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부동산 시장이라는 틀 밖으로 아예 벗어나고 싶었다. 최 소장은 "부동산이라는 이 경주에 한번 참여하면 발을 빼지 못하고 갇히게 될 것 같았다"며 "누군가는 저희를 낙오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자산은 늘지 않았을지언정 부동산 스트레스 없이 살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부부가 집을 짓는 데는 대지 구입 비용을 포함해 약 3억 원(2019년 기준)이 들었다.
집 짓기를 결정한 뒤에는 층별 구성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세로로는 한 층에 하나의 기능을 넣어 배치했는데 1층은 필로티 주차장, 2층은 서재와 화장실, 3층은 주방, 4층은 침실과 화장실, 5층은 옷방과 욕실로 이루어졌다. 3층까지는 공용 공간으로, 4층부터는 사적 공간으로 구성해 동선 낭비를 최소화했다. 수직 동선은 부부에게도 낯설었지만 살아보니 "우려만큼 불편하지는 않다"고 했다. 오히려 부부가 일할 때 적정한 생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고양이들에게도 집 자체가 "세상에서 가장 큰 캣타워"가 되고 있어 만족한다.
다만 협소 주택은 일반 주택보다 설계 단계부터 면밀히 신경 써야 할 게 많다. 우선 가전, 가구의 크기는 물론 반입 계획까지 고려해야 한다. 최 소장은 "협소 주택은 계단의 폭이 가구를 옮기기에 충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가구를 어떻게 집 안으로 반입할지 생각해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세로로도 가구, 가전을 폭이 좁은 계단 대신 창문으로 옮길 수 있도록 설계했다.
수납 공간도 설계 단계부터 계획하면 더 효율적인 공간 사용이 가능하다. 세로로는 2층 계단 하부 공간을 전면 책장으로 만들고, 5층에는 박공 지붕 모양에 맞는 맞춤 가구를 짜 넣어 수납을 해결했다. 최 소장은 "이불, 여행용 캐리어 같은 짐들을 정리할 수 있도록 깊이 있는 수납 공간을 계획하면 편리하다"고 조언했다.
세로로는 분명 협소 주택이지만, 집에 들어오면 그 사실을 잊게 된다. 한양도성공원과 맞닿아 있는 집 서쪽 면에 난 큰 창 덕이다. 우거진 나무가 담긴 창은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주는 동시에 공간을 넓히는 효과를 준다. 부부가 이곳에 집을 짓기로 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공간은 삶을 바꾼다. 부부 역시 이 집에 살면서 창 밖을 보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 최 소장은 "전에는 '창 밖을 봐야지'라고 의식하고 봤다면 지금은 자연스럽게 창 밖으로 시선이 간다"며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햇빛의 강도나 바람 소리는 예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라고 말했다. 협소 주택에 불가피한 계단도 단점보다는 장점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최 소장은 "계단을 이용할 때 불편함도 있지만 층마다 다른 다채로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크다"며 "2층 창문에서는 고양이를, 3, 4층에서는 나무를, 5층에서는 새를 가까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 소장도 이 집이 건축가로서 처음 짓는 협소 주택이었다. 과거 대형 건축사사무소에 다닐 때는 대체로 비싸고 큰 건물을 짓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지금은 '스몰러'라는 건축사사무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작은 집을 의뢰받아 설계하고 있다. 세로로는 지난해 서울시 건축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작은 땅에 알차게 지어진 건물로 도시의 풍경을 바꾼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과거에는 건축이 굉장히 돈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는데 이제는 작은 땅에 작은 집을 지어 살기 원하는 젊은 사람들도 많아졌다"며 "협소 주택은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어려운, 굉장히 특수한 형태의 주거지만, 누군가에게 분명 주거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협소 주택이라고 해서 집의 기능에만 충실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협소 주택에도 '작은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공간 효율만 생각하면 5층의 욕조 대신 샤워 부스를 설치하는 게 맞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5층 옷방도 순수하게 기능만 생각했으면 한 벽면을 모두 수납 공간으로 채웠겠지만, 일부 포기하고 그 대신 창을 냈다. 수납 공간이 없으면 그만큼 안 채우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수납 공간은 줄었지만 가족들은 자연을 가까이에서 보는 기쁨을 얻었다.
1m 폭의 작은 발코니는 때때로 피크닉 장소가 된다. 쿠션에 기대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바람을 쐬던 순간은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최 소장은 "수납 한두 칸을 좀 포기하더라도 단독 주택에는 지켜야 하는 가치들이 있고, 이런 공간들로 또 다른 즐거움이 생기더라"며 "이런 게 집을 짓고 사는 의미인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