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만화 ‘철인 캉타우’와 ‘심술가족’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만화를 그린 이정문 화백의 이름은 아주 익숙하다. 그가 1965년에 발표한 미래만화 ‘서기 2000년대 생활의 이모저모’라는 한 쪽짜리 만화 때문이다. 그는 “35년 후 우리들의 일상이 얼마나 달라질까?”란 질문을 던진 후 그 대답으로 만화를 그렸다.
태양열 주택, 전파신문, 전기자동차, 로봇청소기, 원격진료, 화면으로 레시피를 보면서 요리하는 부엌, 원격수업, 화상통화 같은 것이다. 내가 이 만화를 본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야 '소년중앙'에 실린 다른 이의 미래 예측 만화를 봤다. 내 기억에 따르면 이것 역시 이정문 화백의 예측과 다르지 않았다. 손목시계 겸 전화기와 벽걸이 TV 정도가 더 있었다.
그렇다면 초등학생들은 이런 미래 예측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초등학생이라면 미래에 대한 다양하면서도 약간은 황당한 꿈을 꿀 나이라서 만화를 보고 흥분했을까? 흥분을 하긴 했다. 하지만 방향이 달랐다. “아니, 뭐 이런 뚱딴지같은 만화가 있어!”라는 게 나와 친구들의 반응이었다. 손목시계 전화기와 벽걸이 TV가 문제였다. 아예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반발하지 못했지만 전화기와 TV는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뭐 이 커다란 전화기를 손목시계에 넣는다고? 그러면 송수화기는 어디에 있는데? 아니, 이렇게 두꺼운 TV를 어떻게 그림처럼 납작하게 만든다는 말이야. 만화를 그린 사람은 브라운관을 본 적이 없는 것 아냐?” 뭐, 이런 시비였다. 경험과 소유는 오히려 상상을 제약한다. 부끄럽고 부끄럽다.
이정문 화백은 올해 4월 '주간경향'에 ‘서기 2050년의 변화된 세상’이란 두 페이지 사이즈의 한 바닥 만화를 그렸다. 이번에는 진지하게 봤다. 기계인체로 장애인이 없어지는 세상, 이산화탄소 포집 장치, 뇌파헬멧, 웨어러블 컴퓨터, 우주 발전소와 무선 송전, 무선 송전을 이용한 직류 사용 휴대폰, 압전 발전기, 해저주택, 움직이는 주택, 날아다니는 자동차 같은 게 들어 있다.
대부분 이미 개발되고 있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약간 실망이다. 1965년과 2021년 사이에는 56년이란 세월이 놓여 있다. 거의 내 인생 길이다. 24세의 이정문과 80세의 이정문은 다를 것이다. 진취성(?)은 떨어졌을망정 시대를 보는 통찰은 여전하다. 그래서 더 신뢰가 간다.
미래학자들의 통찰의 근거는 무책임이다. 누가 수십 년 뒤에 와서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따질 리가 없으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뒷걸음치다 쥐 잡는 소처럼 뭔가 하나만 걸리면 통찰력 있는 사람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맞는 것만 기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학자들은 사실 ‘아무 말 잔치’를 한다.
우리가 미래를 이야기할 때 꼭 상상만을 가지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이미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SF 작가인 윌리엄 깁슨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미래는 이미 여기에 있다. 단지 골고루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정문 화백은 1965년에는 주로 IT 쪽의 변화를 예측했다면 2020년에는 전기에너지 획득 방식에 대한 예측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미 와 있지만 아직 골고루 퍼지지 않은 것들이다. 그의 1965년 예측 가운데 실현되지 않은 것은 달나라로 수학여행 가는 것 딱 하나다. 그런데 어느새 이것도 이미 있는 미래가 되고 있다. 몇몇 부자가 우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미래가 이미 여기에 있다. 이정문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