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쓸 일 없는 명함인데… 그래도 하나 드려야겠죠?"
전국이 30도 넘는 무더위에 시달린 지난 16일. 여름에도 서늘하다는 대관령인데도 금세 녹초가 되는 날씨였지만, 기자를 맞는 김창열(73) 한국자생식물원장의 발걸음은 홀가분해 보였다. 김 원장은 반평생 가꿔온 식물원을 최근 산림청에 기부했다. 그의 원장 명함엔 국내 자생종인 흰양귀비의 씨앗 봉지가 붙어있었다.
김 원장이 식물원을 정식 개관한 때는 1999년이지만, 토종식물과 함께한 세월은 훨씬 오래다. 83년 산솜다리 재배가 시작이었다. 30대 중반이던 그는 그때까지 농사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다. 김 원장은 "당시 솜다리가 보호식물로 지정돼 채집 단속이 강화됐는데, 인공 재배로 원하는 사람들이 갖게 한다면 그것 역시 보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면서 "농촌의 새로운 소득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를 실천에 옮겼다"고 돌아봤다.
식물을 기르기에 유리한 기후를 찾아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터를 옮긴 김 원장은 다른 들꽃에도 눈을 돌렸다. 섬백리향, 깽깽이풀, 미선나무 등 수많은 자생종이 땅에 심겼다. 그렇게 재배 면적이 점점 넓어지면서 농장은 식물원으로 거듭났고, 지금은 평창군 대관령면 내 7만4,000여㎡ 부지에 희귀·특산 자생식물 1,356종 205만 본을 보유하고 있다. 감정평가액은 202억 원에 달한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특히 2012년 원인 모를 화재로 전시관이 전소돼 식물원 일반 공개를 중단해야 했다. 지금의 본관을 새로 지어 지난해 재개장할 때까지 8년이 걸렸다.
다시 문을 연 식물원은 조형물 '영원한 속죄' 전시로 또 다른 곡절을 겪었다.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소녀 앞에 성인 남성이 머리를 조아린 형상의 이 동상은, 남성의 얼굴이 당시 일본 총리였던 아베 신조를 닮았다는 논란 속에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일각에선 외교적 결례라는 비판이 나왔고, 식물원을 직접 찾아와 작품 철거 요구 시위를 한 시민단체도 있었다.
김 원장은 작품 전시를 기획하고 제작을 의뢰한 당사자다. 그는 "식물원을 다시 열면서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소녀상을 예술작품으로 전시했다"며 "소녀를 혼자 두는 대신, 누군가 잘못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애착을 보여주듯이 소녀상이 설치된 땅은 기부 대상에서 제외됐다.
화제 속에 식물원을 다시 열었지만, 김 원장은 1년 만에 국가 기부를 결정했다. 서울대 등 여러 기부처 의견을 고려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고 한다. 그는 "식물원은 만들어질 때부터 내 것이 아니라 사회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라며 "더 큰 울타리 안에서 조성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기부 이유를 밝혔다. 지난 7일 산림청과 기부채납식을 가진 김 원장은 △100년간 식물원을 유지 보전할 것 △외래종을 도입하지 말 것 △직원 고용승계를 보장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100년 넘게 자생식물원으로 보존된다면 이후엔 용도를 바꾸려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될 거란 생각에서였다.
원장직은 내려놨지만 김 원장의 자생식물 키우기는 계속된다. 식물원 숙소 생활을 청산하고 인근에 집 한 채 짓고 살 채비 중이라는 그의 다음 목표는 왕벚꽃나무다. 그는 "한국에 있는 벚나무는 대부분 일본산 '소메이요시노' 품종"이라며 "벚나무를 한국 고유종으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난해부터 식물원 곳곳에 토종 왕벚꽃나무를 심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5년 뒤 이곳에서 국내 첫 왕벚꽃축제를 여는 것이 소원"이라는 바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