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 박정희 전 대통령, 국가산업단지. 구미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그중 금오산은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 옛사람들은 중국의 오악 중 중악인 숭산(崇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지금의 이름은 삼국시대의 승려 아도(阿道)가 저녁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황금빛 까마귀를 보고 ‘금오(金烏)산’이라고 한 데서 유래됐다.
구미 도개고 야구부는 “금오산 정기를 받은 팀”이라고 자부한다. 도개고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금오산과 여러모로 연계시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금오산과 도개고 야구부 모두 도시의 변방에 있지만 지역을 넘어서는 유명세를 가졌고, 금오산이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산의 반열에 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산이듯 도개고 야구부도 때때로 전국구 강팀을 잡아내는 비범한 구석이 있다. 차이가 나는 부분은 역사다. 금오산은 이름의 유래를 찾는데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도개고 야구부는 창단 5년차의 신생팀이다.
도개고 야구부의 화제성을 생각하면 신생팀이란 말이 무색하다. 도개고는 구미에서도 변방에 속하는 인구 2천300명에 불과한 면 단위에 위치한 데다 야구부원도 27명에 불과한 미니팀이지만 야구부 덕분에 구미고, 구미전자공고, 금오공고 등 구미 중심부에서 야구부를 두었던 팀들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사실, 이는 도개고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명문고의 조건 중 하나가 야구부를 두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도개고도 야구부 덕을 제대로 보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구미에서도 변방, 구미 도심보다 의성과 군위에 더 가까운 도개고가 야구부를 등에 업고 인지도를 급상승시켰다.
학교 분위기도 확 바뀌었다. 야구부가 전국대회에 출전하면 학생들이 경기 결과에 주목하는 것은 물론 전국의 명문고 팀과 대결하는 학교 선수들을 보면서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 한 마디로 학교에 활력이 생겼다. 전국 어디를 가도 “구미에서 야구하는 학교 아니냐”면서 도개고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이 생기면서 애교심과 자긍심이 야구부 창단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전언이다.
신생팀인 만큼 보강해야 할 부분도 많다. 무엇보다 학교에 야구장이 없다. 안동 예일고처럼 학교 인근에 야구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구 42만이지만 구미는 언필칭 야구 불모지다. 중고교 야구팀이 친선경기나 연습경기를 펼칠 수 있는 정규 규격의 야구장이 전무하다. 안동처럼 차선책도 마련할 수 없다는 점은 깊이 숙고해야 할 문제다.
다행히 교내 야구장 건설과 관련해서 계속 긍정적인 신호가 계속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이용석 도개고 교장이 이사회와 함께 발 벗고 나서서 교육청과 협의해 나가고 있다. 야구장 예정 부지의 70%는 이미 확보해 놓았다. 30% 더 확보하면 적정 규모의 부지가 확보된다. 현재 인근 농가와 협의중에 있다. 현재 상황으로 3년 정도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선수 수급의 어려움은 가장 현실적인 고충이다. 대구에 있는 고교 야구팀들은 우수 자원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간다고 아우성이지만 도개고 입장에서는 대구팀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박강우 도개고 감독에 따르면 대구는 야구 명문 중학교도 다수 있고, 인근 지역에서 대구로 진입하는 선수도 적지 않다. 반면 도개고처럼 지역 고등학교는 수도권은 물론 지방 대도시에도 선수 유치 경쟁에서 밀린다.
박강우 도개고 감독은 “선수 입장에서 현재의 자신의 기량 향후 기량 발전을 위해서 무조건 대도시에 강팀이 좋은지 고려해볼 만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곧장 도개고로 진학하면 경기에 뛸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고 경험과 실력을 쌓을 수 있는데, 선수층이 두터운 대도시의 강팀에서 대체 선수로 제자리걸음을 하는 걸 볼 때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는 것. 최근에는 중학교 선수들과 학부형들이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을 현장에서 느끼고 있다고 했다. 예년과 비교할 때 도개고로 바로 입학을 타진해 오는 중학교 선수들이 많이 늘었다는게 그 증거다. 박 감독은 “조금씩 상황이 나아져서 그나마 다행이다”고 밝혔다.
그러나 야구장 건립과 선수 수급과 함께 엘리트 야구계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신생팀이 전통의 강호들 틈에서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도개고가 속한 주말리그 경상권 A권역에는 대구고 경북고 상원고 경주고 포철고 예일고가 포진하고 있다. 지역을 넘어 전국구 강팀이 대부분이다. 특히 대구의 3개교는 전국 우승을 목표로 하는 강팀들이고, 포철고는 최근 10년간 경북의 왕좌를 한번도 놓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라이벌을 확실히 넘어서는 것이 급선무다. 도개고의 라이벌은 안동 예일고다. 두 학교는 같은 시기에 야구부가 창단된 만큼 자연스럽게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 경북 서부와 북부를 대표하는 이 두 팀 만날 때마다 묘한 기류가 형성된다. 매승부마다 불꽃 튀는 접전이 벌어진다. 올해도 두 팀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명승부를 여러 번 펼쳤다. 최근 전적은 도개고의 승리였다. 시종일관 끌려가다가 후반에 극적으로 6대5 역전승을 이끌어냈다.
한 학부형은 “감독님의 리더십 덕분에 아이들이 동기부여를 받고 용기를 가지고 경기에 임하다 보니 연습한 것보다 더 뛰어난 플레이를 펼칠 때가 많다”면서 “열정과 용기에서 비롯된 실력 이상의 플레이가 결국엔 진짜 실력으로 굳어질 거라 믿는다”면서 감독에 대한 신뢰를 내비쳤다.
도개고가 아직 신생팀인데도 불구하고 강팀들도 이 팀을 만만하게 보지 못한다. 간혹 도깨비 마술을 부리는 까닭이다. 전력상으로만 보자면 분명 약체인데 뜻밖의 실력을 보여줄 때가 적지 않았다. 상대팀들이 도개고와의 경기에서 잠시도 긴장을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이를테면, 주전 선수들을 쉬게 하고 그동안 출전 횟수가 적었던 선수를 기용한다든지, 기량 체크를 목적으로 저학년 유망주를 투입시켰다가는 여지없이 당한다. 뜻밖의 일격을 맞고 고개를 떨군 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팀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서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도깨비팀이 도개고다.
도깨비팀의 면모는 올해도 여전했다. 주말리그 전반기에 포항구장에서 황금사자기 준우승팀 대구고와 포철고가 경기를 펼쳤다. 포철고가 승리를 가져갔다. 예상을 뒤엎은 결과이긴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포철고는 최근 10년간 경북의 독보적 강자이자 실세팀으로 군림해온 까닭이다. 진짜 이변은 다음날 일어났다. 도개고는 대구고를 꺾은 경북 절대강자 포철고를 7회에 8대1 콜드 게임으로 집에 돌려 보내버렸다. 다시 한번 도깨비팀의 면모를 증명한 순간이었다.
때때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저력과 함께 도개고 야구팀을 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요인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팀을 이끄는 박강우 감독이다. 그는 광주의 야구명문 광주상고(현 광주 동성고)출신이다. 경상도 야구팬들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은 학교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핵 잠수함’으로 이름을 날린 박충식 선수가 바로 광주상고 출신이다. 박 선수는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에 맞서 혼자 15이닝 동안 181구를 던져 2대2 무승부를 이끌었다. 박 선수는 그날 역투로 어깨에 손상을 입었다. 몸이 재산인 프로 선수가 몸에 무리가 가는 줄 알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진 것이었다. 그 경기로 그의 야구 생명은 단축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도 그때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 한 경기 그 불꽃 튀기는 역투로 자신의 존재가 삼성라이온즈 팬들의 뇌리와 심장에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열정의 화신이 될 줄은. 지역 야구팬들은 1993년 프로야구에서 가장 찬란하게 피어올랐던 ‘불꽃’ 박충식 선수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박 감독을 알고 나면 그 빚을 갚아 줄 때가 왔다는 생각을 하는 팬들이 적지 않을 듯. 비록 동일 인물은 아니지만, 그를 떠올리며 같은 학교 출신인 박강우 감독이 구미 지역에 정착하고 롱런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야구팬들에게 잊지 못할 가을의 전설을 선물한 레전드에게 가장 근사한 형태의 보은이 되지 않을까.
한편, 도개고는 8월4일부터 17일까지 강원도 횡성에서 열리는 대한야구 소프트볼 협회장기 전국고교야구 대회에 경북 대표로 출전한다. 1993년 삼성을 밝힌 ‘불꽃’ 박충식의 후배 박강우 감독이 27명의 도깨비를 이끌고 이번 대회에서 어떤 기적을 이끌어낼지 야구팬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