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복원 30년

입력
2021.06.24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무엇보다 민족의식의 구심점인 조선왕조를 말살시키는 작업을 서둘렀다. 저항을 의식해 은근하게 진행하되, 매우 효과적인 술책을 기민하게 동원했다. 왕위 계승의 단절 같은 핵심 조치 외에,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등을 점진적으로 해체해 나갔다. 1916년에 착공해 10년 만에 경복궁 전면에 대못을 박은 것처럼 우뚝 자리 잡은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제 한반도 영구지배 야욕의 강력한 상징이 됐다.

▦ 이미 경술국치 1년 전인 1909년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는 등 다른 법궁에 대한 훼손이 가속화한 상태였다. 경복궁도 총독부 건설 전에 이미 궁내 공원 신축, 박람회 개최 등의 핑계로 수많은 전각들이 공매, 해체돼 크게 훼손됐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19세기 말 ‘북궐도형’에 존재했던 609동의 경복궁 전각들은 겨우 40여 동만 남게 됐다. 광복 시점에 남은 주요 전각은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수정전, 자경전 등에 불과했다.

▦ 1990년대 국력이 크게 신장되면서 민족문화 창달 차원에서 조선왕궁 복원이 정부 장기계획으로 추진됐고,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 ‘경복궁 복원 기공식’을 거쳐 본격화했다. 경복궁 복원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김영삼 대통령 때 총독부 건물을 부분 폭파 후 완전 해체해 철거한 일이다. 당시 건물을 옮겨가겠다는 일본의 요청을 일축하고 건물을 아예 ‘날려버린’ 건 김 대통령의 과감하고 거침없는 스타일이 고스란히 반영된 조치였다.

▦ 하지만 경복궁 복원엔 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선 일제가 불교 석탑 전시장처럼 변형한 근정전 뒤편 침전 복원공사를 통해 1995년 강녕전과 교태전 등이 제 모습을 찾았다. 이어 세자의 동궁 권역, 총독부 건설 때 멸실된 흥례문,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태원전 등을 거쳐 2010년 새 광화문을 복원해 1차 복원사업이 끝났다. 문화재청은 2045년까지 예정된 2차 복원사업을 추진 중인 가운데, 24일 경복궁 복원 착공 30주년 학술대회를 열었다. 100년을 이어갈 민족문화 복원사업의 뜻깊은 이정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장인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