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군 수비면 소재지로 들어서면 마을 어귀에 ‘발리소공원’이 있다. 수령 30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 대여섯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그 아래에 벤치 몇 개가 놓인 동네 공원이다. 길 건너 발리천 가에는 노송의 호위 속에 약천정이라는 소박한 정자가 들어앉았다. 1778년 이 마을 출신 금희성이 글 공부할 때 샘물을 마시고 병이 나아 그 자리에 지은 정자라 한다. 정자 뒤편에는 역시 이곳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이름을 떨친 화가 금경연을 기리는 비석이 있고, 주변은 아담한 솔숲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찾는 이가 없어서인지 잡풀만 무성하다.
수비면(首比面)은 중국 은나라의 백이와 숙제가 은거한 수양산에 비견될 정도로 깊은 산중이라는 의미다. 세상과 담을 쌓고 숨기 좋은 곳이다. 발리리(發理里)는 그런 수비에서 마을이 시작되는 곳이다. 세계적 휴양지인 인도네시아 발리와 발음이 같다. 바다만 없을 뿐, 높은 산에서 흘러내린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자연을 품고 있어 ‘한국의 발리’라 해도 부족하지 않다. 가장 큰 차이라면 시설이 부족하고 관광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아는 사람만 아는, 호젓한 자연 속 휴식처다.
자작나무는 회색빛 겨울 숲에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나무다. 은백색 나뭇가지가 빼곡한 숲을 거닐면, 금방이라도 숲의 정령과 마주칠 듯한 신비로움에 빨려든다. 특히 눈이 내리는 날이면 특유의 매력에 포근한 감성이 더해진다. 한여름의 자작나무숲은 어떨까. 발리에서 약 6㎞ 떨어진 죽파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검마산(1,017m) 중턱에 자작나무숲이 있다.
솔잎혹파리 피해로 집단 폐사한 소나무를 베어내고 1993년 조림을 시작했으니 채 30년이 안 된 젊은 숲이다. 그럼에도 평균 키가 20m에 달할 정도로 자랐다. 자작나무는 북위 45도 이북의 추운 지방에서 잘 자란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는 눈 덮인 시베리아 자작나무숲의 대향연이 펼쳐진다. 백석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도 자작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자작나무(白樺)’라는 시를 보면 나무가 고향 그 자체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영양에 자작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건 순전히 고도가 높은 덕분이다. 해발 600m 언저리 검마산 산비탈 30여 헥타르가 온통 자작나무숲이다. 녹음으로 가득한 숲에서 불현듯 나타나는 순백의 목책, 그 나무기둥 사이를 헤집고 임도와 숲길로 연결된 산책로를 천천히 걸으면 두어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올려다보고 만져도 보고, 한 발 두 발 옮길 때마다 하얀 기둥이 슬로비디오처럼 다가왔다 멀어진다. 이따금씩 얇은 나뭇잎이 바람에 팔랑거리면 신선한 초록이 똑똑 떨어지는 듯하다. 완전히 딴 세상 여행이다. 겨울만 좋은 줄 알았는데 하얀 숲이 내뿜는 청량함은 오히려 여름이 낫다.
자작나무는 가지를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나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껍질을 만져보면 아기의 볼살처럼 촉촉하고 매끈하다. 기름기를 많이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가지를 감싸고 있는 왁스 층은 한겨울 추위를 견디는 비결이다. 부피 생장을 하며 자연스럽게 한 겹씩 벗겨지는 껍질은 놀잇감으로 그만이다. 숲 해설가와 동행하면 자작나무 껍질을 활용한 그림 그리기를 할 수 있고, 거울을 이용해 숲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도 있다.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숲 명상을 즐겨도 좋다. 개별 여행자는 아직까지 숲 해설 서비스를 이용하기 힘들다. 단체의 요청이 있을 때만 남부지방산림청의 숲 해설가가 동행한다.
자작나무숲에 가려면 죽파마을에 차를 대고 임도를 따라 약 4㎞를 걸어야 한다. 경사가 거의 없고 잘 다져진 흙길이어서 어렵지 않다. 길 양편으로 나무가 우거져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란히 이어지는 죽파계곡(하천 이름은 장파천이다)에서는 청아한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대나무가 많아 죽파리라 했다는데, 실제 대나무는 보기 어렵고 물박달나무, 사시나무, 물푸레나무 등 잎이 넓은 활엽수가 대부분이다. 녹음 속에서 손발을 담그고 더위를 씻기에 더없이 좋은 계곡이다. 지역에서도 일부만 알음알음으로 알고 있는 숨겨진 피서 명당이다.
수비면의 또 다른 물줄기인 장수포천은 수하계곡으로 불린다. 주변에 오염원이 없고 바위 자갈 모래가 적당히 섞인 맑은 계곡이다. 산중 협곡이지만 수심은 깊어야 1m 정도에 불과해 여름철 물놀이하기에 적당한 피서지로 알려져 있다. 뱀처럼 구불구불 산자락을 돌아가는 물길은 울진에서 왕의 피난처라는 의미의 ‘왕피천’이라는 이름을 얻어 동해로 흘러 든다.
수하2리 신기(새터)마을에서 도로가 끝나는 오무마을까지 자연 경관이 특히 빼어나다. 특별히 ‘국제밤하늘보호공원’으로 지정된 구간이다. 국제밤하늘협회(IDAㆍInternational Dark-sky Association)로부터 ‘은밤(Silver Night)’ 등급을 받아 육지에서는 가장 투명한 밤하늘을 관측할 수 있는 곳으로 인증받았다. 계곡을 따라 민가가 몇 채 있지만 빛 공해가 거의 없어 은하수, 유성 등 우주 현상을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는 지역이다.
그 중심에 반딧불이천문대가 있다. 박찬 천문대 연구원은 “입지 조건만 따지면 단연 국내에서 최고”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천문대라고 하면 흔히 얼마나 성능이 좋은 망원경을 보유하고 있는가로 그 수준을 따지지만, 별은 맨눈으로 관찰할 때가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이라고 덧붙였다. 빛이 없는 수하계곡은 어느 곳보다 별보기 좋은 곳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천문대 주변 조명도 무릎 높이에서 바닥으로, 길의 윤곽을 알아볼 정도로만 희미하게 비춘다.
쏟아질 듯 총총한 별빛이 밤하늘의 낭만을 선사한다면, 주변 습지의 반딧불이는 여름 밤의 추억을 되살리는 존재다. 천문대 맞은편에 반딧불이 생태공원이 조성돼 있다. 오후 9시 이후 밤이 이슥해지면 짝을 찾는 애반딧불이가 영롱한 빛을 발하며 풀섶을 유영한다. 8월이면 애반디보다 큰 반딧불이가 나타난다. 초록을 머금은 노란 형광 불빛이 다시 한번 여름밤을 신비롭게 장식한다. 안타깝게도 지난해와 올해는 예전에 비해 개체수가 적은 편이다. 이태 전 폭우로 계곡이 휩쓸려 내려가는 바람에 반딧불이 유충의 먹이인 다슬기가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반딧불이 생태공원에는 낮에도 노란 물결이 일렁거린다. 잘 익은 보리밭 가장자리로 금계국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산책로를 깔끔하게 정비해 놓아 산골의 호젓한 초여름 정취를 즐길 수 있다.
수비면에서 울진 백암온천으로 이어지는 88번 국도변의 본신계곡 역시 더위를 피하기 좋은 한적한 계곡이다. 도로변에 이정표가 따로 없어 목적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내비게이션에 ‘수비면 한티로 1065’를 입력하면 ‘금강소나무생태경영림’ 입구에 닿는다. 오랫동안 인근 주민들의 쉼터이자 마을 숲이었고, 지금은 울진 소광리와 마찬가지로 금강소나무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숲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주변으로 아름드리 금강송과 어린 소나무가 울창하다.
개울을 건너면 ‘수비솔솔유아체험원’이다. 소나무뿐만 아니라 다양한 활엽수가 공존하는 숲속 놀이터다. 나무를 활용한 시소와 그네, 자연 지형을 이용한 미끄럼과 모험 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그렇다고 아이들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녹음이 짙은 오솔길 산책로를 걸으면 초록으로 샤워를 한 듯 개운해진다. 금강송 군락지로 이어지는 울련산 등산로는 현재 낙석 위험으로 막아 놓은 상태다.
본신계곡은 행정구역상 수비면 신원리다. ‘원(院)’으로 끝나는 지명이 대개 그렇듯, 신원리 역시 조선시대 관원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울진 방향으로 조금만 더 가면 구주령이다. 아홉 개의 구슬을 꿰어 놓은 것처럼 구불구불한 고갯길이다. 신원은 힘들게 구주령을 넘은 울진 평해 부사와 그 일행이 묵어가던 곳이었다. 동해의 해산물과 경북 내륙의 농산물이 오가던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 구주령 정상에 서면 발아래로 왕피천 깊은 계곡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이고, 동해바다 수평선도 아련하게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