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 유자녀 여성의 삶, 더 많이 얘기되기를”

입력
2021.06.16 04:30
22면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 출간 최은미 작가
코로나로 고립된 여성의 불안 그린 '여기 우리 마주' 등 수록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가시화한 것 중 하나가 일하는 기혼 유자녀 여성의 삶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면서 돌봄 노동을 오롯이 부모가 떠안게 됐고, 최종적으로는 엄마의 몫으로 남았다.

2021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최은미 작가의 단편소설 '여기 우리 마주'는 이처럼 팬데믹 이후 사회에서 고립된 여성의 불안을 그린다. "어쩌면 맞춰 가고 있다고 믿었던 일과 가사와 육아의 균형"이 2020년 봄을 기점으로 무너진 여성의 일상을 통해 코로나 시대의 살풍경을 인상적으로 소묘한다.

최 작가의 신작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에는 '여기 우리 마주'를 비롯해 삶을 옥죄어 오는 불안 가운데 놓인 다양한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을 통해 여성-가족-사회를 둘러싼 미세한 공기를 포착한다. 7일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최 작가는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서 나 자신이 겪은 자기혐오를 비롯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여러 종류의 혐오에서 출발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사회에서 기혼 유자녀 여성은 "내가 속해 있는 제도권 가족 체계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내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과업" 사이에서 모순을 느끼는 존재들이다. 실제 초등학생 딸을 기르면서 소설가로 일하는 최 작가의 고민이 소설에 자연히 녹아들었다.

그중에서도 소설 '보내는 이'는 같은 이름을 가진 딸을 키우는 두 기혼 여성의 관계와 그들 사이의 긴장을 그린다. 이를 통해 그간 피상적으로 그려져 온 '맘카페' 속 '맘충' 엄마들을 '영지'와 '진아'라는 개인으로 소환한다. 최 작가는 "유자녀 기혼 여성들의 얘기를 더 듣고 싶은 독자로서의 갈증이 탄생시킨 작품”이라고 말했다.

"아이를 양육하는 기혼 여성들은 보통 바깥의 시선에서, 정형화돼 그려졌어요. 같은 처지의 기혼 여성들이 서로를 보는 시선은 없었어요. 사실 기혼 여성들 간에는 혐오가 일어나기 쉬워요. 사회가 그들에게 보내는 혐오의 시선을 스스로 내면화한 상태거든요. 그 자기혐오를 같은 처지의 사람에게 투사하는 거죠. 그걸 둘러싼, 넘어선 기혼 여성 간의 다양한 관계를 그리고 싶었어요.

"초등학생 딸 기르며 소설가로 일하는 개인적 고민도 반영"

책에 실린 소설은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쓰인 것들이다. '페미니즘 리부트'로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던 시기와 겹친다. 소설 역시 자연히 이 영향 아래 놓여 있다.

“이전까지는 나 자신의 고통을 듣는 데만 집중했던 것 같아요. 그것도 밀착해 듣기보다는 출구가 없는 곳에 인물들을 가둬놓고 비명 지르는 걸 거리를 두고 보기만 했죠. 그런데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해 동시대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고, 제 고통이 공적인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것만으로도 숨이 트였죠. 이번 책에는 제가 그렇게 들은 여성 화자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어요."

표제작인 '눈으로 만든 사람'에서 시작해 '나와 내담자', '내게 내가 나일 그때'로 이어지는 3부작은 이런 깨달음을 통해 비로소 쓰일 수 있었던 작품이다.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인 여성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외면 없이 직시한다. 과거의 상처를 꽁꽁 묻어 두기만 했던 소설 속 인물들은 2016년부터 쏟아져 나온 성폭력 고발 기간을 통과하면서 폭력의 재의미화 과정을 거친다.

“사실 여성들은 자신이 겪은 폭력을 인식하고 난 후에 또다시 고통스러운 분열의 시간을 거치게 돼요. 내가 겪은 게 뭔지 의미화했고, 이를 통해 나 자신은 변화했는데 정작 주변은 그대로일 때 모순과 괴리를 느끼거든요. 3부작 속 인물들을 통해 이 몇 년간의 변화를 그리고 싶었어요.”

기혼 여성 사이의 관계를 손쉬운 '연대'로 포장하지 않고 그 사이에 놓인 혐오를 분명하게 바라본다. 폭력 고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발 이후에 찾아오는 혼란을 말한다. 미화도, 지나친 비관도 없는 최 작가의 세계는 고통스럽지만 이는 모두 고통을 제대로 마주 보려는 안간힘이다. 그리고 이 안간힘은 결국 동시대 여성들에게 보내는 화답의 신호다. "소설을 쓰는 동안 다른 많은 여성들의 글을 읽었어요. 그 덕에 나를 표현하고 싶어졌고요. 제 글 역시 그런 다양한 목소리 중 하나로 다른 여성들에게 들리길 바랍니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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