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러시아 '보복 대리전'으로 번진 항공기 강제 착륙 사태

입력
2021.05.28 16:30
EU "벨라루스 항공 역내 진입 금지" 조치에
러시아, 프랑스·오스트리아 항공 착륙 불허
국제항공기구, 항공법 위반 여부 조사키로

벨라루스의 민간여객기 강제 착륙 사건이 서방과 러시아 간 ‘항공 보복 대리전’으로 번지고 있다. 사실상 민항기 납치라고 판단한 유럽연합(EU)이 벨라루스에 역내 영공 진입 금지 등 강경 대응에 나서자 유일한 우군인 러시아가 같은 방식으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27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이날 프랑스 파리발 모스크바행 에어프랑스 항공기가 러시아 항공당국의 착륙 거부로 이틀째 운항이 취소됐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발해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오스트리아항공 여객기 역시 같은 이유로 뜨지 못했다.

앞서 23일 벨라루스 당국이 반(反)체제 인사 체포를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 아일랜드 소속 항공기를 수도 민스크공항에 강제 착륙시키자, EU 회원국 정상들은 벨라루스 항공기의 EU 역내 비행과 공항 이용을 금지하는 제재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착륙을 거부당한 두 항공사를 비롯, 일부 회사는 유럽항공안전청(EASA) 권고에 따라 벨라루스 영공 비행도 피하고 있다. 항공사가 타국 영공을 통과하기 위해 매년 수백만 달러를 지불하는 점을 감안해 재정적 타격을 입히려는 의도다.

이처럼 서방의 벨라루스 때리기가 본격화하면서 러시아가 대신 맞대응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가 벨라루스 영공 비행을 피하는 모든 항공편 입항을 거부할지는 미지수다. 일단 영국 브리티시 에어라인, 네덜란드 KLM 등 다른 유럽 항공사들은 이날 문제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다만 양측의 대치가 계속될 경우 보복 악순환으로 이어져 항공 대란을 부추길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실제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들은 이날 공동 성명을 통해 “벨라루스 당국 행위에 책임을 묻는 노력을 강화 하겠다”며 추가 제재를 예고했다. EU 외교장관들 역시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에 대한 경제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 가디언은 “러시아의 보복이 일시적인지, 지속적인 대치 신호인지는 불확실하다”면서도 “(상황이 악화할 경우)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국영항공사 ‘아에로플로트’를 제재하는 등 전선이 확대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여기에 국제기구도 조사 개시를 결정하면서 진영 갈등 양상은 보다 뚜렷해질 전망이다. 유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이날 “회원국(벨라루스)의 국제항공법 위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며 조사 착수 방침을 밝혔다. 국제민간항공협약은 각국의 배타적 영공 주권을 인정하되, 비행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는 금지하고 있다. 세르게이 구드코프 ICAO 러시아 특사는 현지 타스통신에 “벨라루스 측은 기내 폭탄 위협 상황 지침과 ICAO 규정에 따라 행동한 것 뿐”이라며 진상조사에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허경주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