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업들이 떨고 있다. 편의점 GS25의 포스터 속 손가락 모양에서 촉발된 ‘남혐 논란’이 유통시장 전반으로 확산해서다. 치킨 프랜차이즈 제너시스비비큐(BBQ)의 ‘소떡’ 메뉴 사진 속 손가락 모양과 한국맥도날드 유튜브 채널의 페미니즘 모델까지 잇따라 도마에 오르자 저마다 홍보물 속 손가락을 전수조사하고 문구를 점검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유통기업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소비자의 비판과 그로 인한 '불매운동'이다. 자초한 일이긴 해도 '불가리스 사태'로 남양유업 홍원식 전 회장이 57년 가업을 포기한 것은 소비자 신뢰를 잃은 기업의 말로를 여실히 보여준다.
30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GS25 포스터 논란 이후 비상이 걸린 유통기업들은 그동안 제작한 각종 홍보물을 일일이 확인하느라 난리 법석이다. 불똥이 튀기 전에 조금이라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미지나 문구는 삭제 또는 수정하고 있다. 물론 삭제·수정한 것은 철저히 대외비다.
그래도 여전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정 커뮤니티에서 암암리에 쓰는 혐오 표현을 모르면 일일이 걸러내기가 쉽지 않다”는 게 한결같은 하소연이다. 직격탄을 맞은 GS25는 문제의 포스터 디자이너가 “아들이 있고 어떤 사상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직접 해명했어도 비판 여론이 여전하자 더욱 고심 중이다. 내부에선 초기 대응이 안이했다는 자성과 함께 “고의가 아닌데 답답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유통업계에선 주요 커뮤니티를 수시로 확인하며 온라인 여론을 살피는 게 홍보팀과 마케팅팀의 새로운 업무가 됐다. 일부는 홍보물 제작 단계부터 혐오 표현을 피해가기 위한 별도의 지침을 마련하기도 한다. 편의점업계 관계자는 “온라인에서 쓰이는 혐오 표현을 총 정리한 매뉴얼을 디자이너들에게 보냈다”고 전했다.
역대 불매운동의 대상은 대부분 유통기업이었다.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가 이뤄지는 구조상 불매운동으로 번지기 쉽고 타격도 어마어마하다. 롯데그룹은 2017년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부지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된서리를 맞았다. 당초 소비자 주도 불매운동으로 시작된 보복 수위는 갈수록 높아져 중국정부가 롯데 현지 법인들을 대상으로 불시에 감사를 하기도 했다.
당시 롯데면세점의 매출 70%, 국내 호텔 투숙객의 30%를 차지하던 중국인 관광객의 발길도 뚝 끊겼다. 그 내상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재계 안팎에서는 롯데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오매불망 기다린다는 얘기도 나온다. 시 주석의 방한은 ‘사드로 인한 외교적 갈등 완화’로 인식돼 중국인 관광객의 발길을 되돌려줄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인 ‘노 재팬(No Japan)’의 타깃이 된 유니클로는 소비자의 집중 포화를 견뎠지만, 매출은 반토막 났고 매장 20여 곳이 문을 닫았다. 2019년 7월 “한국의 불매운동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한 유니클로 일본 본사 임원의 발언이 반일(反日) 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유니클로는 꿋꿋하게 할인 행사를 펼쳤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2019년 8월 종로점, 2020년 8월 강남점에 이어 올해 1월 플래그십 스토어인 명동중앙점과 3월 홍대점 등 서울 주요 상권에서도 문을 닫았다. 지난해 말 187곳이던 유니클로 매장은 이달 기준 142개점(온라인매장 1개점 포함)으로 줄었다. 유니클로 국내 운영사인 에프알엘(FRL) 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은 2019년에 비해 41% 감소했다.
지난 27일 한앤코에 매각된 남양유업은 소비자가 제품뿐 아니라 마케팅 및 납품 과정까지 들여다본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남양유업은 2013년 ‘대리점 갑질 사태’로 한 차례 불매운동을 겪었다. 지난달에는 불가리스 제품이 코로나19를 77.8% 저감하는 효과를 확인했다고 주장해 주가가 뛰고 불가리스 판매량이 급증했지만, 해당 연구가 임상시험이나 동물시험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또다시 불매운동의 타깃이 됐다. 소비자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소비자를 기만하면) 기업은 반드시 망한다는 표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불매운동 대상이 된 기업은 혼쭐나지만 소비자주권이 한층 높아진 점은 긍정적이다. 소비자들은 불매운동으로 기업 때리기에 나서는 한편 착한 기업이 잘되도록 ‘구매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무라벨 생수나 친환경 빨대 등 친환경 제품에 지갑을 열거나 남 몰래 선행을 한 식당을 널리 알려 매출을 올려주는 식이다.
지난 1월 가정형편이 어려운 형제에게 치킨을 무료로 준 프랜차이즈 점주의 사연이 알려지자 소비자들은 해당 지점에서 치킨을 주문하고 편지, 선물 등을 보내며 선행을 응원했다. 급기야 해당 점주는 “밀려오는 주문을 다 받고자 하니 100% 품질 보장을 할 수 없어 영업을 잠시 중단한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이른바 “돈쭐(돈+혼쭐)낸다”는 신조어의 대표적 사례다.
이 같은 흐름에 대해 유통기업들에선 "소비자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지점에 무지했다"는 반성이 나온다. 한 유통기업 관계자는 "처음엔 손가락 문제의 본질이 혐오 논란이라고 생각했는데 세대격차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보인다"며 "50대의 관점에선 이해가 안 되지만 2030세대의 시각에선 ‘역린’을 건드리는 표현으로 통하더라”고 말했다.
소비자 중심 전략을 재정립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고객층을 보다 세분화하고 세대별 취향이나 관심사, 행동방식에 맞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MZ 세대(밀레니엄 세대+Z 세대·1980~2000년대생) 내에서도 구매력과 경제력이 다른데 20대 초반부터 30대 후반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을 뭉뚱그린 측면이 있다”며 “세대별 소비자 분석을 원점부터 다시 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