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격리병동 노인의 쓸쓸한 죽음, 사망 후 통보된 '음성'판정

입력
2021.05.0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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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오연택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봄은 시작의 계절이다. 겨우내 잠자던 초목은 다시 초록빛 숨을 내쉬며 한 해를 준비한다. 사람들도 저마다의 꿈을 안고 다시 힘차게 걸음을 내딛는다.

갓 면허를 딴 애송이 의사의 1년도 그런 날에 시작됐다. 하지만 기대는 처음부터 산산이 무너졌다. 의사로서의 내 첫봄은 지독한 코로나, 그놈과 함께였다.

코로나 앞에선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발열 얘기가 나오는 순간, 모두 백기를 들었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아무것도 안 돼! 이 때문에 환자는 입원할 때 무조건 코로나 검사부터 해야 했다. 그런 다음 격리병실로 한 명씩 이동했다가, 음성 판정이 나오면 일반병동으로 옮기는 과정을 반복했다.

코로나가 휘몰아친 뒤론 죽음도 평범할 수 없었다. 봄바람이 불던 어느 날, 한 분이 떠나가셨다. 내가 경험한 격리병동에서의 첫 죽음이었다.

80대 노인이 응급실에 도착한 건 저녁 무렵이었다. 기저질환자였다.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폐렴증상이 발견됐다. 호흡은 불안했고 산소포화도도 떨어져 있었다. 1차 코로나 검사를 한 뒤 곧바로 중환자실 격리병동으로 옮겨 인공호흡기를 부착했다.

코로나 검사는 두 차례 실시된다. 두번 다 음성이어야 최종 음성판정을 받는다. 응급실 도착 직후 진행한 노인의 첫 번째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격리병동 중환자실에서 다시 한번 검사를 했다. 그리곤 몇 시간 뒤 노인은 숨을 거뒀다. 뒤이어 전달된 최종 판정결과는 음성이었다.

가족들이 병원에 도착했다. 아무리 고령자라 해도 응급실에 온 지 반나절여 만에 이렇게 이별을 하게 되리라곤 누구도 생각 못한 것 같았다. 가족들은 모두 오열했다. 내과 선생님은 그들 앞에서 다시 한번 사망선고를 했다.

“2020년 ○월 ○일 ○시 ○분 ○○○님, 사망하셨습니다.”

가족들은 병원에서 제공한 N95 마스크와 비닐 가운을 쓴 뒤에야 겨우 5분 정도, 고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일부 가족만 출입이 허용됐다. 고인은 코로나와 무관함이 최종 판정되었지만, 병동에 있는 다른 환자 중에는 양성이 있을 수 있고 이 경우 교차감염 위험이 있기 때문에 격리병동에선 무조건 보호장구 착용과 시간제한(5~10분)이 적용됐다. 만약 고인이 양성이었다면, 보호장구고 뭐고 아예 들어가질 못했을 것이다.

코로나 격리병동이란 그런 곳이다. 이곳엔 도덕도, 상식도, 규범도 없다. 단 하나, 괴물 같은 코로나를 막기 위한 차디찬 의학 규칙만 존재한다. 환자는 양팔과 가슴에 수액줄을 주렁주렁 매단 채, 홀로 쓸쓸이 떠나야 했다. 마지막 순간 누구도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영혼 없이 돌아가던 기계장치와,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만 환자 옆에 있었을 뿐이다. 평생을 함께한 가족들이 있었건만 따뜻한 배웅도, 이별다운 이별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작 이 빌어먹을 코로나는 모든 게 다 끝나고서야 ‘최종 음성’이란 검사결과만 달랑 띄우고, 줄행랑을 쳤다. 나는 이 잔혹하고도 허탈한 상황에 미칠 것만 같았다. 코로나는 이렇게 우리 모두를 조롱하고 있었다.

“인턴샘, 저기 사망환자분, 라인(수액줄) 정리 좀 해주세요.”

보호자가 병동을 나가고,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고인 곁으로 다가갔다. 영혼이 떠난 자리엔 생명의 흔적은 없었다. 입술은 더 이상 붉지 않았고, 문득 만져본 손발은 차가웠다. 탁해진 눈은 채 감지 못해 허공을 보고 있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던 걸까. 나는 정중히 이불을 걷고, 수액줄을 뽑은 뒤 지혈했다. 때로는 큰 구멍에 바느질하며, 한 사람을 살리려 했던 의학의 흔적이 하나씩 없어졌다.

할 일을 모두 마치고 격리병동 밖으로 나왔다. 육중한 철문 앞엔 유가족이 모여있었다. 서로 위로하며 울고 있었다. 차라리 병원에 오지 않았으면, 집에서 가족들끼리 편안하게 마지막을 지킬 수도 있었을 텐데. 격리병동의 닫힌 철문은 더 이상의 출입을 막고 있었고, 그 자리를 도망치듯 피해 나왔다.

코로나가 우리 생활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지 벌써 1년 반이 되어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죽어갔다. 확진 사망자는 이름 대신 '○번 환자'로 기록됐다. 그 노인처럼 격리병동에서 쓸쓸이 숨진 음성 환자도 부지기수다. 코로나는 삶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평온을 허용치 않았다.

그날, 시작의 봄날에, 무너진 내 출발을 대신한 기억은 코로나로 희롱당한 강렬한 마침의 기억이다. 생명의 종료. 마지막 작별. 마지막 정리. 그 흐름 속에서, 나는 끝까지 코로나가 만든 놀음판을 벗어나지 못했다.

산산이 조각난 내 시작이지만 언젠가 코로나가 끝난다면, 하나씩 맞춰질 것이다. 그때는 이 뒤엉킨 세상도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나는 오늘도 N95를 쓰고 격리실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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