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시작의 계절이다. 겨우내 잠자던 초목은 다시 초록빛 숨을 내쉬며 한 해를 준비한다. 사람들도 저마다의 꿈을 안고 다시 힘차게 걸음을 내딛는다.
갓 면허를 딴 애송이 의사의 1년도 그런 날에 시작됐다. 하지만 기대는 처음부터 산산이 무너졌다. 의사로서의 내 첫봄은 지독한 코로나, 그놈과 함께였다.
코로나 앞에선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발열 얘기가 나오는 순간, 모두 백기를 들었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아무것도 안 돼! 이 때문에 환자는 입원할 때 무조건 코로나 검사부터 해야 했다. 그런 다음 격리병실로 한 명씩 이동했다가, 음성 판정이 나오면 일반병동으로 옮기는 과정을 반복했다.
코로나가 휘몰아친 뒤론 죽음도 평범할 수 없었다. 봄바람이 불던 어느 날, 한 분이 떠나가셨다. 내가 경험한 격리병동에서의 첫 죽음이었다.
80대 노인이 응급실에 도착한 건 저녁 무렵이었다. 기저질환자였다.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폐렴증상이 발견됐다. 호흡은 불안했고 산소포화도도 떨어져 있었다. 1차 코로나 검사를 한 뒤 곧바로 중환자실 격리병동으로 옮겨 인공호흡기를 부착했다.
코로나 검사는 두 차례 실시된다. 두번 다 음성이어야 최종 음성판정을 받는다. 응급실 도착 직후 진행한 노인의 첫 번째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격리병동 중환자실에서 다시 한번 검사를 했다. 그리곤 몇 시간 뒤 노인은 숨을 거뒀다. 뒤이어 전달된 최종 판정결과는 음성이었다.
가족들이 병원에 도착했다. 아무리 고령자라 해도 응급실에 온 지 반나절여 만에 이렇게 이별을 하게 되리라곤 누구도 생각 못한 것 같았다. 가족들은 모두 오열했다. 내과 선생님은 그들 앞에서 다시 한번 사망선고를 했다.
“2020년 ○월 ○일 ○시 ○분 ○○○님, 사망하셨습니다.”
가족들은 병원에서 제공한 N95 마스크와 비닐 가운을 쓴 뒤에야 겨우 5분 정도, 고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일부 가족만 출입이 허용됐다. 고인은 코로나와 무관함이 최종 판정되었지만, 병동에 있는 다른 환자 중에는 양성이 있을 수 있고 이 경우 교차감염 위험이 있기 때문에 격리병동에선 무조건 보호장구 착용과 시간제한(5~10분)이 적용됐다. 만약 고인이 양성이었다면, 보호장구고 뭐고 아예 들어가질 못했을 것이다.
코로나 격리병동이란 그런 곳이다. 이곳엔 도덕도, 상식도, 규범도 없다. 단 하나, 괴물 같은 코로나를 막기 위한 차디찬 의학 규칙만 존재한다. 환자는 양팔과 가슴에 수액줄을 주렁주렁 매단 채, 홀로 쓸쓸이 떠나야 했다. 마지막 순간 누구도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영혼 없이 돌아가던 기계장치와,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만 환자 옆에 있었을 뿐이다. 평생을 함께한 가족들이 있었건만 따뜻한 배웅도, 이별다운 이별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작 이 빌어먹을 코로나는 모든 게 다 끝나고서야 ‘최종 음성’이란 검사결과만 달랑 띄우고, 줄행랑을 쳤다. 나는 이 잔혹하고도 허탈한 상황에 미칠 것만 같았다. 코로나는 이렇게 우리 모두를 조롱하고 있었다.
“인턴샘, 저기 사망환자분, 라인(수액줄) 정리 좀 해주세요.”
보호자가 병동을 나가고,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고인 곁으로 다가갔다. 영혼이 떠난 자리엔 생명의 흔적은 없었다. 입술은 더 이상 붉지 않았고, 문득 만져본 손발은 차가웠다. 탁해진 눈은 채 감지 못해 허공을 보고 있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던 걸까. 나는 정중히 이불을 걷고, 수액줄을 뽑은 뒤 지혈했다. 때로는 큰 구멍에 바느질하며, 한 사람을 살리려 했던 의학의 흔적이 하나씩 없어졌다.
할 일을 모두 마치고 격리병동 밖으로 나왔다. 육중한 철문 앞엔 유가족이 모여있었다. 서로 위로하며 울고 있었다. 차라리 병원에 오지 않았으면, 집에서 가족들끼리 편안하게 마지막을 지킬 수도 있었을 텐데. 격리병동의 닫힌 철문은 더 이상의 출입을 막고 있었고, 그 자리를 도망치듯 피해 나왔다.
코로나가 우리 생활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지 벌써 1년 반이 되어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죽어갔다. 확진 사망자는 이름 대신 '○번 환자'로 기록됐다. 그 노인처럼 격리병동에서 쓸쓸이 숨진 음성 환자도 부지기수다. 코로나는 삶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평온을 허용치 않았다.
그날, 시작의 봄날에, 무너진 내 출발을 대신한 기억은 코로나로 희롱당한 강렬한 마침의 기억이다. 생명의 종료. 마지막 작별. 마지막 정리. 그 흐름 속에서, 나는 끝까지 코로나가 만든 놀음판을 벗어나지 못했다.
산산이 조각난 내 시작이지만 언젠가 코로나가 끝난다면, 하나씩 맞춰질 것이다. 그때는 이 뒤엉킨 세상도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나는 오늘도 N95를 쓰고 격리실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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