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반도체 대란이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각국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특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공급망 복원과 관련, 글로벌 기업들과 화상회의를 연 가운데 인텔에선 차량용 반도체 생산 계획까지 내놨다. 이에 따라 이 회의에 참석한 삼성전자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자동차 칩 공급망 확대를 위해 총력전에 나선 미 정부가 삼성전자에 측면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다. 미 정부가 대규모 보조금을 유인책으로 제시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지만 실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선뜻 나서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4일 외신에 따르면 인텔은 12일(현지시간) 열린 백악관 반도체 공급망 회의 이후 자동차 칩 생산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늦어도 올 하반기 중엔 실제 자동차 칩을 생산할 수 있도록 차량용 반도체 설계업체와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텔은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의 절대 강자다. 반도체 설계부터 생산까지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종합반도체 기업이지만 지금까지 차량용 반도체 생산 경험은 없다. 인텔의 행보는 다분히 반도체 굴기를 전면에 내세운 미 정부 정책에 보조를 맞춘 측면이 강하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는 자동차 칩 생산 계획을 깜짝 발표한 뒤 CN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관점을 대통령과 공유할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 경제에서 자동차의 비중은 상당하다. 국내총생산(GDP)의 5.5%를 자동차가 담당하고 있다. 미국 자동차산업협회가 백악관에 정부 자금을 즉각 자동차 칩 생산에 투입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배경이다.
현재 빚어진 자동차 칩 부족 사태의 결정적 이유는 자동차 칩을 만들어 줄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미 정부가 삼성전자에 인텔처럼 자동차 칩 생산에 나서 달라고 요청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에 20조 원 규모의 신규 반도체 공장 신축을 검토 중인데, 신규 공장에 자동차 칩 라인을 깔아 달라고 요청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삼성전자는 세계 2위 파운드리인 만큼 자동차 칩을 위탁생산할 수 있다. 기술장벽이 높은 자동차 칩 설계 분야와는 다르다. 인텔 역시 설계가 아닌 순수 자동차 칩 위탁생산만 맡을 것으로 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다만 삼성전자로선 자동차 칩 생산에 뛰어든다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자동차의 사용주기를 약 10년으로 산정한다면 한 번 자동차 칩 라인을 깔면 적어도 시장과의 신뢰 유지를 위해 똑같이 10년은 유지해야 한다. 더구나 자동차는 워낙 고가 상품이다 보니 판매량이 스마트폰에 견주면 미미하다. 반도체 회사로선 오히려 라인 유지 비용이 더 들어간다. 삼성전자가 미국의 테슬라 등 일부 자동차 칩 위탁생산을 하고 있긴 하지만 사업 규모를 더 늘리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 정부가 생산 라인 구축에 필요한 비용을 모두 대주는 식의 당근을 내세워 삼성전자를 설득할 것이란 시나리오도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보조금을 받는다 해도 초기 투자비용이 더 들어 오히려 손해를 각오해야 한다"며 "그럼에도 인텔까지 나선 상황이라 삼성전자로서도 고민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