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둑, 만리장성 넘고 제2의 르네상스 맞은 원동력은

입력
2021.03.1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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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제 공포증' 털고 3년 연속 중국에 우세 유력
2014년 정부예산 투입 결실


한국 바둑이 LG배와 농심배에서 잇따라 '숙적' 중국을 꺾으면서 바둑계가 모처럼 기대에 부풀어있다.

신진서 9단은 지난달 25일 온라인대국으로 열린 제22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커제 9단(중국)을 상대로 한국의 우승을 확정지었다. 한국은 지난 2018년 이후 2년 연속 중국에 뺏겼던 농심배 타이틀을 3년 만에 가져오면서 통산 우승 횟수도 13회로 늘려 중국(8회)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앞서 신민준 9단도 지난달 3, 4일에 열린 LG배 결승 3번기 2, 3국에서 커제에게 2-1로 역전승을 거두며 중국을 충격에 빠트렸다.

커제는 그동안 한국 기사들에게 강한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11월 열렸던 삼성화재배에서는 신진서를 꺾고 정상에 오르면서 "나를 증명하게 해줘 (신진서에게) 고맙다"는 소감을 남겨 한국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랬던 커제는 두 대회 연속 무너졌고, 특히 신민준에게 졌을 때는 얼마나 분했는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의 '커제 공포증'이 중국의 '공한증'으로 바뀌기 시작한 데는 정부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큰 몫을 했다는 게 바둑계의 중론이다. 한국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이세돌 9단을 앞세워 세계 최강으로 군림했다. 이른바 바둑 르네상스를 연 주역들이다. 그러다 2013년 무려 18년 만에 세계대회 무관의 충격에 빠졌다.

위기감을 느낀 한국기원은 2014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해 상비군ㆍ대표 강화 사업 정부예산을 확보, 그해 5월부터 국가대표 상비군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임된 유창혁 9단은 2014년 3회 우승을 달성, 나란히 3승을 거둔 중국을 다시 따라잡으면서 전년도 무관의 충격을 털어냈다.


2015ㆍ2016년에는 반격에 나선 중국에 4승 15패로 밀리며 고전했지만 2017년 지휘봉을 잡은 목진석 감독 체제에 접어들며 본격적으로 정부 지원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2017년 세계대회 우승 경쟁에서 5승으로 중국(6승)을 추격하기 시작한 한국은 2018년 7승(중국 5승), 2019년 7승(중국 4승)으로 추월에 성공했다. 상비군ㆍ대표 강화 사업 정부예산을 투입한 지 4년 만에 맺은 결실이다. 지난해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 속에서 중국과 2승씩을 나눠가진 가운데 에이스 신진서가 응씨배와 춘란배 결승에 진출해 있어 3년 연속 우세가 유력하다. 신진서는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대국이 많지 않아 국가대표 리그가 큰 도움이 됐다”고 자신이 성장한 비결을 꼽았다.

목진석 감독도 "중국에 밀리던 2014년부터 문체부의 후원으로 국가대표 상비군을 운영하면서 정상급 프로기사들의 체계적인 공동 훈련과 유망주 육성에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면서 "그 결과 박정환 신진서 신민준 등 세계 정상급 기사를 배출해 한국 바둑이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성환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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