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건과 다이애나

입력
2021.03.08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전 세계 호사가들의 관심을 끈 영국 해리 왕손 부부 인터뷰가 영국 왕실에 커다란 폭탄을 떨구고 막을 내렸다. 메건 마클 왕손빈이 아들 아치를 임신하고 있을 당시 한 왕실 가족이 “태어날 아기의 피부색이 얼마나 검을지” 걱정했으며, 이것이 아치가 왕손의 칭호를 받지 못한 주요 이유라고 폭로한 것이 가장 강력했다. 그는 왕실의 제약이 너무 심해 자살 직전까지 갔었다고도 했다. 해리는 “자신의 가족은 동정심이 없고, 감정 교류가 불가능하고 계산적”이라고 했다.

□ 메건의 인터뷰는 26년 전 자신의 시어머니인 고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나의 결혼 생활에는 세 명이 있었다”며 찰스 왕세자와 커밀라 파커볼스 현 왕세자빈과 불륜을 공개했던 영국 BBC 인터뷰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영국 인구의 절반이 그 인터뷰를 지켜봤고, 대부분 그녀를 지지했다. 다이애나는 이혼 후 활발한 사회봉사 활동과 미모 패션 등으로 영국을 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고, 찰스 왕세자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를 극심하게 질투했다는 증언이 줄을 이었다.

□ 메건은 이런 다이애나를 적극 모방한다. 이번 인터뷰에도 다이애나의 팔찌를 차고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2018년 해리와 결혼한 후 메건이 선택하는 의상 모자 장신구는 늘 다이애나의 그것과 비교됐고, 일치율도 상당히 높다. 언론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메건의 의도된 행동으로 보인다. 영국 왕실이 지우려 애쓰는 다이애나에 대한 기억을 그의 며느리가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환기하고 있지만, 여왕의 반격은 아직 ‘메건의 왕실 직원 괴롭힘’ 폭로같이 저급한 수준에 그친다.

□ 1997년 다이애나의 장례식에서 엘턴 존은 ‘바람 속 촛불’(Candle in the Wind)을 불렀다. 원래 메릴린 먼로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곡인데 ‘다이애나’의 생애에 맞춰 개사했다. 다이애나나 먼로 모두 거대 권력과 가까이하다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는 공통점 때문에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메건은 어떻게 될까. 오늘 메건은 ‘바람 속 촛불’ 같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영국 왕실을 향해 돌격하는 잔다르크처럼 보였다. 세상이 그만큼 많이 변했다.

정영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