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극장가는 재개봉 영화 천하였다.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전체 관객수는 73.7%나 쪼그라들었는데 재개봉 영화 관객은 163%나 늘었다. 신작이 사라진 스크린을 재개봉 영화들이 채웠다. ‘극장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말이 나오거나 ‘구작이 명작’이라는 유행어가 생겨날 판이다.
지난 19일 영화진흥위원회가 공개한 ‘2020 한국 영화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재개봉 영화 관객 수는 201만367명이었다. 2019년(77만2,315명)보다 2.6배 늘어난 수치다. 재개봉 영화 전체 매출액은 2019년(62억원)보다 133.6% 증가한 146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재개봉 영화 중 흥행 1위(관객 기준)는 할리우드 영화 ‘위대한 쇼맨’(2017)이 차지했다. 지난해 5월 21일 극장가를 다시 찾아 6일 연속 흥행 1위를 차지하며 30만6,419명을 모았다. 휴 잭맨과 잭 에프론 등 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위대한 쇼맨’은 2017년 연말 대목을 겨냥해 12월 20일 첫 개봉했으나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한국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1,441만754명)과 ‘1987’(723만1,638명)의 흥행 기세에 밀려 관객 140만3,019명을 모으고 극장을 떠났다. 첫 개봉 당시엔 일일 흥행 1위에 한번도 오르지 못했다. 재개봉이 패자 부활전 역할을 한 셈이다. 재개봉 영화 흥행 2위는 16만3,630명이 본 '인셉션'(2010)이 올랐다.
‘라라랜드’(2016)도 신작 부럽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14만437명을 모으며 재개봉 영화 흥행 3위에 올랐다. 재개봉 영화로서 9일 연속 흥행 1위를 달리는 기현상을 연출하기도 했다. ‘라라랜드’는 매년 극장가를 다시 찾고 있는데, 2018년엔 2만7,993명, 2019년엔 3,214명을 각각 모았다. 지난해 유난히 관객수가 급증했다. 관객들의 뜨거운 재개봉 영화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의 재개봉 성적은 더 놀랍다. 첫 개봉 때보다 관객이 100배 이상 늘었다. 장국영(장궈룽)이 주연한 유명 영화 ‘패왕별희’(1993)를 재편집해 상영시간을 15분 늘려 2017년 첫 선을 보인 이 영화는 관객 1,085명과 만나고선 극장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지난해 5월 1일 재개봉한 후 10만2,205명이 봤다. 4월 30일부터 5월 5일까지 이어진 황금연휴에 이렇다 할 영화가 없는 상황에서 중장년 관객층의 향수를 자극한 점이 주효했다.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은 재개봉 영화 흥행 4위에 올랐다. 영진위 보고서는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의 흥행을 “재개봉 기획전의 관객층을 (20~30대에서) 중장년층까지 확대했던 사례”라고 평가했다.
극장에게 재개봉은 일종의 고육지책이다. '승리호'나 '모가디슈' 같은 화제작들이 극장 개봉을 미루거나 넷플릭스로 직행하면서 대체재로 재개봉 영화를 찾고 있다. 국내 최대 멀티플렉스체인 CGV는 지난해 7월 자체 축적한 빅데이터와 머신 러닝을 활용해 재개봉 영화를 선정한 후 상영하는 기획전까지 개최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재개봉 특별관인 ‘별★관’ 32개를 새로 열었다.
올해도 재개봉 영화 열풍은 뜨겁다. ‘해리포터와 불의 잔’(2005)은 지난 10일 재개봉해 5만9,149명을 모았다. 지난해 11월 재개봉한 ‘화양연화’는 올해에만 5만8,349명(23일 기준)을 모아 올해 상영 영화 중 흥행 11위에 올라있다. 재개봉 누적관객수는 9만4,085명이다.
흥행하는 재개봉 영화의 공통점은 팬덤이다. 재개봉 영화가 홍보를 위해 굿즈를 적극 활용하는 점도 팬덤과 관련돼 있다. ‘라라랜드’를 수입한 판시네마의 이재빈 과장은 “해외 영화의 경우 굿즈는 홍보 목적으로만 만들 수 있어 희소성이 강하다”며 “‘라라랜드’와 ‘화양연화’처럼 예쁘고 인상적인 굿즈를 만들기 좋은 영화가 재개봉에서 흥행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재개봉 영화 시장에서 한국 영화는 유난히 약세다. 흥행 순위 10위 안에 한 작품도 없다. 지난해 재개봉 한국 영화 중 흥행 1위는 ‘동감’(2000)으로 5,152명을 모으는데 그쳤다. CGV 관계자는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극장을 찾아오는 주요 관객층은 20~30대 마니아”라며 “언제 어디서든 찾아 볼 수 있다 생각하는 한국 영화보다 외화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