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령 책방 주인이 가고, 180년 독립서점 문이 닫혔다

입력
2021.02.22 04:30
24면
헬가 바이헤(Helga Weyhe, 1922.12.11~2021.1.4?)


독일은 '책 시장(Buchmesse)'이란 게 처음 생긴 나라다. 15세기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면서 인쇄업이 시작되고 작가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그 시장이 전쟁을 비롯한 크고 작은 시련에도 점점 몸집을 키워 오늘의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됐다. '도서정가제'를 만든 나라도 독일이다. 19세기 말 거대 상업자본이 책 대량 구매-할인 판매로 유통시장을 독점하려 들자, 1888년 출판인 겸 서적상협회 회장이던 아돌프 크뢰너가 상인 규약으로 도서 정가 판매를 의무화한 게 시작이었다. '크뢰너의 개혁'이라 불리는 도서정가제는 자유경쟁의 자본주의 이념에 맞서며 출판 및 유통 생태계 다양화에 기여했고, 협약의 형태를 거쳐 2002년 '독일출판물정가법'이란 법률로 정착됐다. 인구 8,300만 명인 독일의 독립서점은 현재 약 3,500곳. 인구가 다섯 배(3억3,000만 명)가 넘는 미국에는 2,500곳 정도가 있고, 한국의 독립서점은 2019년 말 현재 551곳이다.

독일이 신성로마제국의 파편같은 도시국가들로 엉겨 있던 1840년, 베를린 북서쪽 약 180km 거리의 옛 한자동맹 무역 도시 잘츠베델(Salzwedel)에 작은 서점이 문을 열었다. 1871년 보불전쟁에서 갓 돌아온 하인리히 바이헤(1846~?)란 청년이 그 서점 건물을 사들여 2층은 살림집으로, 1층에는 호두나무빛 책장과 진열대를 다시 놓고 'H. 바이헤 서점'이란 새 간판을 걸었다. 거기서 아들을 낳고 손녀를 보았고, 아들(발터(Walter, ? ~1975)이, 손녀(Helga)가 차례로 서점을 물려받았다. 그 만 180년 세월 동안 독일은 비스마르크 체제의 제2제국이 됐다가 두 차례 세계대전과 나치 제3제국의 패망, 소비에트 지배와 만 40년 분단- 재통일(1990년)의 역사를 거쳤다. 하지만 서점은 단 한 번 자리바꿈도 없이 거의 원형 그대로 영업을 계속해왔다. 새해 첫 영업일이던 지난 1월 4일, 독일서 가장 오래된 그 독립서점이 문을 열지 않았다. 그날 만 98세 현역 최고령 서점 주인이던 독신 여성 헬가 바이헤(Helga Weyhe)가 2층 살림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족쇄같고 감옥같던 서점에서...

아버지처럼 헬가도 잘츠베델 알트페르베르(Altperver)가 11번지 서점서 태어나 책 먼지 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새 동화책을 헬가에게 먼저 읽힌 뒤 반응을 살펴 매대에 둘지 말지 정하곤 했다. 41년 고교를 졸업한 헬가는 나치 치하의 청년노동봉사대에 강제편입돼 농장 의무노역을 마친 뒤, 브레슬라우 대학과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빈 대학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했다. 여성으로선 집안에서 처음 대학에 진학한 거였다. 그는 인구 2만명 남짓의 손바닥만 한 동네를 벗어나 드넓은 세상에서 활개치며 살고 싶어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대학이 문을 닫으면서 그는 5학기 만인 44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히틀러가 건재하던 때였다. 전쟁이 끝나고 49년까지 잘츠베델에는 소련군이 주둔했고, 이후 동독에 편입됐다. 2012년 한 인터뷰에서 헬가는 "당시엔 여기 머무는 것 말곤 길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사서도 되고 싶었고 출판사에서도 일해보고 싶었다고, 책을 팔더라도 뉴욕의 삼촌 서점에서 팔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형인 에어하트 바이헤(Erhad Weyhe, 1883~1972)는 1914년 미국으로 이민 가서 뉴욕 '렉싱턴 794'번지의 유명한 예술 전문 출판사 겸 서점(E. Weyhe, Inc)를 설립해 케테 콜비츠 등 유럽 예술가들을 미국에 소개하고, '바이헤 갤러리'에서 마티스와 피카소를 미국에 소개한 문화계 명사였다. 헬가는 수시로 대서양을 넘나드는 삼촌을 보며 그 세계를 동경했지만, 전쟁과 냉전기 동독 치하에서는 가망 없는 꿈이었다. 65년 아버지가 은퇴하고, 서점은 헬가의 몫이 됐다. 한국의 대다수 독립서점 주인이라면 전월세 걱정도 없는 그의 행로가 부럽기도 하겠지만, 당시 헬가에겐 그 서점이 운명의 족쇄였다.

나치는 유대인의 책은 못 팔게 검열했고, 소련 점령군과 동독 정부는 여러 차례 민간 영리 서점을 폐쇄-몰수하려 했다. 헬가는 "그때마다 당국에 우리 서점을 좋게 말해준 이들이 있어, 그들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실 지역 당국자도 대부분 청소년기 교과서와 참고서를 산 고객이었다. 서로 다 아는 작고 정체된 마을이어서, 오래된 작은 서점이어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헬가 부녀도 당국의 지침에 순응하며 기술서적과 일부 종교서적만 판매해야 했다. 그 숨막히는 긴 세월 동안에도 헬가는 매주 엿새를 2층 집과 1층 서점의 쳇바퀴처럼 닫힌 공간을 오가며, 감춰둔 다락방의 책들을 읽으며, 허기와 갈망을 달랬다.

동독 정부가 해외 여행을 허가한 것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4년 전인 1985년이었다. 만 63세의 헬가에게 그해 5주 동안의 뉴욕 여행은, 삼촌도 삼촌의 책방도 사라진 뒤였지만, 늦으나마 꿈의 성취였다. 그는 '렉싱턴 애비뉴' 도로 표지판 기념품을 사와선 맨해튼 스카이라인 포스터와 함께 바이헤 서점 서가 위에 두고 바라보곤 했다.



목재 골조를 노출시켜 벽면을 채운 고졸한 반골조(half-timbered) 건물의 서점은 10평 남짓의 매장과 좁은 사무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책방 나무문이 열리면 사무실에 있던 헬가는 말년까지 지팡이 대신 책 더미를 짚고 나와 손님을 맞이하곤 했다. 그는 서가의 책 전부를 자신이 읽었거나 대충이나마 훑어본 책들로만, 그래서 만족하고 신뢰할 만한 책으로만 채웠다. 헬가가 "개망나니들(just broken guys)의 이야기"라고 여긴 범죄-스릴러 소설은 아무리 베스트셀러라도 갖다두지 않았고, 그나마 봐줄 만하다고 평한 애거사 크리스티나 잉그리트 놀(Ingrid Noll)의 책도 팔지는 않았다. 대신 주요 역사서와 유명인의 평전, 고전급 작가들의 문학서들은 아무리 오래된 책이어도 웬만한 건 다 갖췄다. 할아버지 대서부터 안 팔려 희귀본이 된 재고 중에는 1893년 판본의 책('Through Cameroon from South to North') 1938년본 책('Introduction to Gothic Painting')도 있었고, 아서 헤일리의 소설 '호텔(1965)' 초판도 있었다.

헬가는 손님이 청하면 흥겹게 책을 추천했고, 그의 적극적인 응대를 기꺼워하는 단골들과의 교류를 무척 즐겼다. 전쟁과 분단 전에 마을을 떠났다가 중-노년이 되어 귀향한 옛 단골도 적지 않았다. 78세의 한 목사(Klaus Schartmann)는 2018년 인터뷰에서 "헬가의 추천은 동화책서부터 성인 문학에 이르기까지 매번 (내 취향의) 정곡을 찌른다. 독일 어디에도 이런 곳은, 잘츠베델의 여기 말곤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헬가는 언제쯤 은퇴할 생각이냐는 물음에 "샤르트만 씨 같은 고객을 나 말고 누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 그가 누린 푸진 자유와 행복

그는 책(독서)은 영혼을 확장-고양시킨다고 믿었고, 그 기준에 못 미치는 책은 책이 아니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책이 너무 많이 나온다"고 말하곤 했다. 극우대중주의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바람은 그의 마을도 잠식해왔지만 그는 이민자 공포를 조장하는 극우 성향의 책은 일절, 아무리 베스트셀러여도 들여놓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무슨 사명감을 갖고 서점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2차대전 뒤에도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독자들이 스스로 알게끔 독일 역사서를 돋보이는 자리에 진열해두곤 했다"고, "지금도 AfD의 세력을 강화하는 종류의 책은 그냥 팔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그렇게 헬가는 감옥같은 작은 서점 안에서, 아무나 누리기 힘든 푸진 자유와 행복을 누렸다.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한 책은 1932년 아버지가 만 10세인 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토마스 만의 딸 에리카(Erika Mann)가 쓴 동화책 'Stoffel fliegt übers Meer(Stoffel flies over the sea)'였다. 슈토펠이란 소년이 비행선에 숨어들어 대서양 너머 뉴욕의 삼촌을 찾아가는 이야기여서, 헬가에겐 더 각별했을 것이다. 그는 "에리카가 이런 동화를 썼다는 건 서점 주인들도 잘 모르는 사실"이라며 은근히 자랑스러워 했고, 책상 한 켠에는 언제나 손때 묻은 그 책 초판이 놓여 있었다. 근년에 복간본이 출간되자 그는 카운터 곁에 서너 권씩 쌓아 두곤 손님에게 "혹시 이런 책은 아느냐"며 소개하곤 했다. 2017년 11월 한 기자가 취재를 나온 날, 한 손님에게 에리카의 동화책 3권을 판 그는 그 벅찬 행운에 아이처럼 기뻐하며 "슈토펠 세 권을 팔았어, 세 권이라구!"라 외치며 곧장 사무실로 들어가 재주문 목록을 수정했다.



그의 서점 유리창에는 마을 주요 행사 알림 포스터 외에 매달 기념할 만한 작가의 말이나 책의 한 구절이 붙어있곤 했고, 그가 특히 사랑한 괴테의 생일에는 장미 한 송이가 따로 나붙기도 했다. 마을 어느 곳에 쓰레기통이 필요하다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민원'을 적어두기도 했다. 시 당국은 도시의 대자보 격인 그 창의 점잖은 민원은 대체로 수용했다. 시의회는 2012년 12월, 만 90세 헬가에게 '명예 시민' 칭호를 부여하며, 마을 수도원 뜰에 괴테가 사랑과 우정의 상징으로 썼던 은행나무 한 그루를, 헬가의 나무로 심었다. 그 '명예'는 헐한 학위 앞에 흔히 붙는 그런 명예가 아니라, 로마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부여한 '제1시민(Princeps civitatis)'과 같은 품격의 명예여서, 1832년 이래 단 12명이 그 칭호를 받았고, 히틀러를 빼면 100년 만에 그가 처음이었다. 잘츠베델 시장 자비네 블뤼멜(Sabine Blümel)은 "헬가 바이헤는 (도시의) 과거를 가장 잘 알면서, 항상 현재에 주목하며 낙관적 미래를 염원했던(...), 우리 도시의 한 기관(institution)"이었다고 애도했다.

바이헤 서점이 새 주인을 맞이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내게 독립서점은...

내가 나고 자란 1960, 70년대, 내가 산 동네에는 책장을 갖춘 집이 드물었다. 책이야 더러들 있었지만 대개 구색용 전집류거나 백과사전이어서, 미심쩍은 도자기나 그릇들과 함께 거실 장식장에 모셔져 있곤 했다. 당시 하위 중산층에게 책(장)은 지위의 상징이자 신분 갈망의 물신(物神)이었다. 생일 초대로 처음 가본 친구 집에서, 잔칫상의 케이크보다 책들로만 채워진 커다란 책장에 압도당한 기억이 내겐 있다.

책장이 생활 가구로 독립한 게 언제쯤인지 모르겠다. 80년대 중반 치솟기 시작한 대학 진학률과 무관하진 않을 듯하다. 하지만 대학 진학률이 83.8%(2008년)를 정점으로 점차 꺾이고 취업률이 더 절박한 지표가 되면서, 이제 책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이들에겐 주거와 이사의 애물단지가 됐다. 책의 물성(物性)적 추락이 그렇게 극적이었다.

그래도 유년기의 허기는 여전히 남아, 남의 집에 가면 책장을 먼저 살피는 게 내 은밀한 쾌락이다. 거기서 특히 좋아하는 책을 만나면 반갑고, 오래되고 드물게 읽힌 책이면 영혼의 일부를 포갠 듯 흥감하기도 한다. 지난 세월의 겹친 한 토막이, 그 인연이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아서다. 때로는 실망도 하지만, 나는 그런 이들의 감각을, 판단을, 대체로 신뢰한다.

독립서점이 내겐 그런 공간이다. 인상파 화가가 붓으로 점을 찍어 그림을 완성하듯 ,알찬 책들로만 한 권 한 권 골라 채웠을 서가. 그 책들을 핥듯이 훑어보며 감각과 취향과 안목을 짐작하고, 나와 활자의 주파수를 맞춰볼 수 있는 곳. 그런 공간의 운영자들은 유명하고 많이 팔리는 책보단 덜 알려졌지만 권하고 싶은 책을 돋보이는 자리에 진열하고, 많이 파는 것 못지않게 아끼는 책이 팔리면 더 기뻐하리란 환상(?)을 나는 갖고 있다. 책값을 계산하며 나는 주인의 표정을 살피곤 한다. 그렇게 내게 독립서점은, 책의 개별적 가치와 안목을 서로 평가하고 평가받는 드문 교류의 공간이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