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들의 재산 기부

입력
2021.02.18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2010년 6월 당시 세계 최고 부호 빌 게이츠 MS 회장 부부와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지인들과 만찬 자리에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기부 문화의 전통을 세우고 싶다”며 재산 대부분을 내 놓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렇게 시작된 더기빙플레지(The Giving Pledgeㆍ기부 서약) 운동은 두 달 만에 래리 엘리슨 오라클 창업자, 테드 터너 CNN 창업자 등 억만장자 40명의 동참으로 이어졌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25개국 219명의 부자들이 합류했다. 최소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의 순자산 중 상당액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하거나 서명을 한 편지를 보내면 더기빙플레지 홈페이지에 게재된다.

□ 우리나라에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2007년 12월 설립한 ‘아너소사이어티’(Honor Society)가 있다. 1억원이 넘는 기부금을 내면 정회원, 5년 내 1억원 이상을 납부하기로 약속하면 약정회원이 된다. 현재 1억원 이상 기부했거나 의사를 밝힌 이는 2,547명(10일 기준), 약정금액은 총 2,749억원이다.

□ 국내 최대 배달앱 ‘배달의민족’을 창업한 김봉진(45) 우아한형제들 이사회 의장이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히며 더기빙플레지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재산이 1조원대로 추정되는 만큼 기부액은 5,000억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김 의장은 아너소사이어티의 최고 기부자이기도 하다. 이미 71억원을 기부했다.

□ 앞서 김범수(55) 카카오 이사회 의장도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다짐을 공개했다. 기부액은 5조원 이상일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기부 약속과 실천은 다르다. 서약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기부 의사를 밝힌 뒤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도 적잖다. 기부를 꼭 떠벌리며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아너소사이어티의 창립 주역으로 훈장까지 받은 '기부왕' 대기업 회장이 비자금 조성 혐의로 조사를 받은 소식도 당혹스럽다. 그러나 그나마 기부하는 시늉조차 내지 않는 부자들이 더 많은 게 우리 현실이다. 흙수저 출신 김범수, 김봉진 의장의 재산 절반 기부 약속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다른 재벌 총수들의 릴레이 기부 선언 동참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박일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