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만의 잘못일까, 배구만의 문제일까… 숨은 공범들

입력
2021.02.1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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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동료 선수 폭행 사실을 인정한 여자배구 흥국생명의 쌍둥이 자매 이재영(25)과 이다영(25)은 구단으로부터 무기한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남자배구 OK금융그룹은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잔여 시즌 경기를 뛰지 않겠다고 한 송명근(28)과 심경섭(30)의 뜻을 받아들였다. 가해 사실을 인정한 4명의 선수들은 일단 배구 코트를 떠난다.

그럼에도 구단과 연맹의 늑장 대응, 이들을 둘러싼 추가 폭로가 이어지면서 여론은 계속 들끓고 있다. 분노의 파장은 실력과 인성을 갖춘 선수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했던 부모와 지도자, 그리고 운동부 내 폭력을 관행이라며 눈감아 준 준 학교 및 관리단체들로 번지고 있다. 되풀이되는 악습을 알면서도 감추기에 급급했던 이들의 책임론이 커지는 이유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청와대에서 황희 신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체육 분야는 국민에게 많은 자긍심을 심어줬으나, 그늘에선 폭력이나 체벌, 성추행 문제 등 스포츠 인권 문제가 제기돼 왔다"며 폭력 등 체육분야 부조리를 근절할 특단의 노력을 기울이라고 지시했다.

전문가들은 엘리트 선수 육성 시스템의 한계를 꼬집으며 모든 구성원들이 공범이라고 꼬집는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체육교육전공 주임교수는 15일 “성적만 나오면 모든 게 용서되는 시절들이 계속돼 왔다”며 “운동만 잘 하면 대학을 갈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잡혀 사회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구조적 문제”라고 짚었다.


지난 10일 이재영-이다영 자매의 근영중 재학 시절 21가지 잘못을 나열하며 처음 폭로한 A씨, 13일 자신을 두 선수로부터 폭행 당한 또 다른 피해자라고 밝힌 B씨, 이튿날 근영중에서 두 선수와 함께 뛴 또 다른 선수의 부모라고 밝히며 두 선수의 모친이자 여자배구 국가대표 출신 김경희(55)씨 등의 잘못을 지적한 C씨, 또 남자배구 송명근과 심경섭의 송림중ㆍ고교 시절 폭행 사실을 13일 폭로한 D씨의 글엔 어린 선수들의 잘못을 방관하거나, 부추기거나, 사고가 터져도 감추는 데 몰두했던 ‘못난 어른들’의 행태가 곳곳에 적시돼 있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선수들보다 더 큰 책임을 느끼고 있어야 할 ‘그 때의 어른들’은 이번 사태 속에서 집중포화를 받고 있는 선수들 뒤에 숨어 비겁하게 침묵하고 있다.



공범① "내 자녀만 성공하면 돼" 그릇된 자녀사랑


"시합장에 다녀보면 쌍둥이(이재영ㆍ이다영)만 하는 배구였고 나머지는 자리를 지켰다. 모친인 김경희씨가 딸(이다영)에게 '언니(이재영)한테 공을 올려라'라고 직접 코치하는 소리를 들었다."
-C씨
"(폭행으로 인한 수술로)평생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데, 그 부모가 와서 '우리 애는 그럴 애가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더라."
-D씨

C씨 주장에 따르면 지난해 '배구인의 밤' 행사에서 장한 어버이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김경희씨는 근영중 내 ‘비선 지도’를 일삼았다. 그의 영향력 아래 있는 두 딸 이재영과 이다영의 팀 내 입지는 절대적이었고, 들러리로 전락해 성장 기회를 빼앗기다시피 한 다른 선수들의 박탈감은 컸다. 송명근 부모의 언행을 지적한 D씨 주장 또한 마찬가지.

그릇된 자녀사랑에 ‘다른 누군가의 자녀’는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돌아올 줄 모르고 던진 부모들의 부메랑은 한참 뒤 돌아와 자신의 자녀를 향했다. 대한민국배구협회는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해 지난해 김씨에게 수여한 장한 어버이상을 취소했다.




공범② "성적만 내면 돼" 학폭 방조한 지도자

"그 둘(이재영·이다영)이 잘못을 했을 때도 (부모님께 말을 해)결국엔 단체로 혼나는 날도 잦았습니다."
-B씨


"감독조차 이 일을 덮고 싶어서 조용히 넘어가려고 사정사정 하더라. 내가 배구에 대한 미련만 없었어도 그 때 용기 내서 다 말했어야 하는 건데…"
-D씨


대회 성적에 매몰돼 선수 인권을 등한시 하거나, 팀 내 에이스 선수 부모들 앞에 ‘알아서’ 엎드리는 지도자들의 굴종도 뿌리 깊은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B씨 얘기처럼 특정 선수들을 감싸는 대신 잘못 없는 선수들에게 벌을 주거나, D씨 주장처럼 팀 내 권력이 센 선수들의 학교폭력이나 갑질을 눈 감거나 덮어 무마시키는 일도 허다하다. 오로지 성적으로만 팀의 가치를 입증하는데 몰두하게 되는 구조도 슬픈 현실이다.

중학생 자녀를 해외로 보낸 다른 구기종목 선수 부모 A씨는 “지도자가 학부모로부터 받은 회비의 불투명한 집행, 금전요구도 체육 지도자들의 신뢰를 갉아먹고 있다”고 했다. 숱한 운동부 관련 사건 사고에 “운동부는 원래 그렇다”는 시선으로 엄중한 잣대를 적용하지 않는 학교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공범③ "조용히 끝나겠지" 안일했던 체육단체

"피해를 받은 아이들이 있고 한두 명이 아닌 상황인데 서로 눈치 보기만 하고 있습니다. (사태를 방치한)구단과 대한민국배구협회, 대한체육회, 지금 방관자 아닙니까?"
- C씨


현장에선 이 같은 사태가 비단 배구계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니며, 다른 종목에서도 공공연히 벌어져 온 체육계 전체의 악습이란 지적이 나온다. 전직 구기종목 단체 관계자는 "각 종목단체 주요 임원 자리도 대부분 해당 종목 선수 출신들이 장악하면서, 선·후배 관계로 얽힌 현장 지도자와 선수들의 잘못을 죄책감 없이 덮어주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관용을 베푸는 일이 반복되는 것 또한 근본적 문제"라면서 "선수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발설하면 불이익으로 되돌아 올 거란 생각에 주저하게 되는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한편 배구계 학교폭력 사태 파장이 커지면서 대한민국배구협회와 한국배구연맹(KOVO)은 뒤늦은 사과와 함께 개선책을 내놨다. 배구협회는 "전문체육, 생활체육 및 국가대표 운영 단체로서 이번 학교폭력 사태로 인해 많은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이재영과 이다영을 2021 발리볼네이션스리그, 도쿄올림픽 등 향후 국가대표 선수 선발 대상에서 무기한 제외하겠다"고 밝혔다.

협회는 이어 "향후 국가대표 지도자 및 선수 선발 시, 철저한 검증을 통해 올림픽 정신을 존중하고 준수하며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국가대표팀에 임할 수 있는 지도자 및 선수만을 선발하겠다"고 강조하면서 "한국배구연맹(KOVO)과 함께 학교폭력 재발 방지 및 근절을 위해 공동 대응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KOVO는 협회 조처와 별개로 16일 KOVO 사무총장 주관으로 학교폭력 근절 및 예방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연다. 이 자리엔 KOVO 자문 변호사와 경기운영본부장, 배구협회 관계자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김형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