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양, 취향 아닌 인격의 문제다

입력
2021.02.02 15:00
25면


오래전 일이다. 여럿이 모인 사석에서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지인의 친구라고 소개받은 그는 훈훈한 외모에 유쾌한 사람이었다. 지인은 그가 정이 많고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특히 개의 양육, 습성, 품종 등에 해박하다고 했다. 공통의 관심사가 있으니 그도 반가운 눈치였다. 흥이 난 그는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저는 안키워 본 품종이 없어요. 토이 푸들 아시죠? 그 종도 키워보고, 코커스패니얼도 키워봤어요. 아, 근데 코커는 진짜 산만하더라구요. 그 녀석 교육시키는데 너무 힘든거예요. 그리고 슈나우저도 키워보고, 허스키랑 비글도 키웠는데... 하하하! 정말 털이 얼마나 빠지던지 외출할 때 애먹었죠."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럼 그 강아지들은 지금은 어디 있나요?" 예상외의 반응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을 했다. "음.. 걔네들은 지금 제 주위 사람들에게 가서 잘 지내고 있어요."

그는 몰랐다. 자신이 한 말이 화려한 '파양'의 이력이라는 것을. 훈훈한 그는 키워본 경험을 자랑했지만, 뒤집어보면 코카도 키우다 버렸고, 푸들도 버렸고, 슈나우저, 허스키, 비글까지 죄다 키우다 버린거다.

사람들은 유기견에 대해서 분노한다. 버려진 동물에 대해 탄식하고 애달파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주위에 동물을 길에 내다버리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1년에 10만마리나 되는 이 많은 유기견은 누가 데려다 버리는걸까.

일반적인 버림의 공식은 이러하다. 눈에 띈 아기 강아지가 맘에 들어 키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귀여운데, 커가면서 덩치도 커지고 집에 혼자 있으면 말썽을 부린다. 놀아주라는데 사실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1~2년은 버텨보다 주위에 아는 사람들에게 키울 사람이 없는지 문의한다. 다 큰 성견을 키울 사람은 흔하지 않다. 어쩌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시골에 사는데 넓은 마당이 있는 집이라 거기로 보내기로 한다. 아쉽고 미안한 마음은 들지만 분명 좋은 집에 가서 잘 살거라 생각한다. 자신은 어쩔 수 없어서 좋은 집에 보낸거지 버린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버림의 공식'이다.

최근 한 배우의 '파양' 이력이 이슈가 되었다. 기사를 보며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특정인을 욕할 것도 아니다. 내가 못 키우는 동물을 다른 집에 보내는 자체를 '파양'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온 행동이리라. 상당수가 그렇다. 하지만 그는 분명 다수의 동물을 키우다 버렸다. 길에 내다 버리는 유기만 '버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책임지지 못하고 양육을 포기하는 것도 결국 버리는 것이다. 자신이 키우지 못해서 포기하는 모든 행위는 버리는 행위다. 우리는 이것을 '파양'이라고 부른다.

반려동물들은 생각보다 잘 기억한다. 특히 첫 번째 가족을 쉽게 잊지 못한다. 추억이 많아서가 아니다. 자신이 살던 집에서 파양되어 낯선 곳으로 옮겨지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동물들은 생각할 것이다. 자신이 왜 살던 집에서 다른 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이유가 뭔지 알아야 이번에는 잘 지내볼텐데 이유를 모르니 갑갑할 것이다. 설사 새로운 집에서 잘 적응하며 살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은 늘 존재하게 된다. 언제 갑자기 이곳에서 다른데로 옮겨지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것은 누구도 지워줄 수 없다.

'애주가' '애연가'처럼 예전에는 '애견가'라는 말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 동물 얘기가 나오면 눈을 반짝이며 앞장서 얘기하고, 동물의 습성, 훈련등 해박한 지식을 뽐내는 경험 많은 자타공인 '동물 좋아하는 사람'. 이런 애견가들은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뻔뻔한지 모른다. 책임이 따르지 않으면 동물을 좋아하는 그 마음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잔혹한 마음이다. 동물을 키우는 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인격의 문제다. 동물을 잘 아는 해박함보다 동물을 평생 책임지는 진득함이 미덕이 되는 세상이 오길.

박정윤 올리브동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