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강 대 강' 대치 국면의 한일관계 전환을 위해 외교적 융통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한때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까지 고려할 정도로 강경했던 대일외교 노선에 적잖은 변화가 예상된다.
문 대통령은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누적된 과거사 갈등에 대한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국 법원의 강제동원 판결에 따라 일본 자산이 압류 매각(현금화)돼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일본 언론 기자의 질문을 받은 문 대통령은 "강제집행 방식으로 그것(일본 기업 자산)이 현금화된다든지, 판결이 실현되는 방식은 한일 양국 간 관계에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동안 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던 문 대통령이 일본기업 자산 현금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은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또 "그런 단계(현금화)가 되기 전에 양국 간 외교적 해법을 찾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지난 8일 나온 위안부 배상 판결까지 더해지며 위기감이 급상승하고 있는 한일관계를 풀기 위한 외교적 해법을 찾겠다는 얘기다. 물론 "원고(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해법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달았지만, "일본이 좀 더 겸허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2019년 신년 회견)"고 했던 데 비해 대일 메시지의 어조가 확연히 낮아진 셈이다.
문 대통령은 "늘 말씀드리는 것은 과거사는 과거사이고, 한일 간 미래지향적 발전은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것대로 해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모든 문제를 서로 연계시켜 다른 분야의 협력도 멈추는 태도는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면서 과거사 한일 간 협력과 과거사 문제와의 분리 대응 필요성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최근 사법부의 위안부 배상 판결에 대해서도 '곤혹스럽다'는 심경을 표현했다. "수출규제와 강제징용 판결 문제 등을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양국이 여러 차원의 대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 위안부 판결 문제가 더해져서 솔직히 곤혹스럽다"는 것이다. 이어 위안부 합의를 '공식적 합의'라고 인정했다.
문 대통령은 "2015년 한일 간 합의가 있었다. 한국은 그 합의가 양국 정부 간 공식적인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도 했다. 그는 "그런 토대 위에서 이번 (위안부 피해자 배상) 판결을 받은 피해자 할머니들이 동의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일본과 협의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결여됐다는 판단에 따라 합의를 백지화한 것으로 평가됐던 문 대통령이 위안부 합의를 인정한다고 밝히긴 이번이 처음이다. 법원 판결과는 별도로 외교적 타협점을 찾기 위해선 위안부 합의를 마냥 무시할 순 없다는 게 정부 판단으로 풀이된다.
한편 사카이 마나부(坂井學) 관방부(副)장관은 이날 오후 정례 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의 대일관계 발언에 대한 일본 정부 입장을 묻는 질문에 "유의(留意)하고 있다"며 "한국 측이 실제로 향후 행동하는지를 확실하게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사카이 부장관은 "일한 양국은 서로 중요한 이웃 나라인데, '옛 조선 반도 출신 노동자'(징용 피해자를 의미) 문제와 위안부 문제 등으로 현재 양국 관계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의 일관된 입장을 토대로 앞으로도 한국 측에 적절한 대응을 강력히 요구해 나갈 것"이라며 "동시에 모든 선택지를 염두에 두고 의연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