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대학 가라" "알바 안돼" 아버지의 통제... 전 언제 어른이 되나요?

입력
2021.01.18 04:30
24면

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는 지난해 입학한 대학생입니다. 전공은 중등 특수교육과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걸 공부한다는 점이 좋아서 선택했지만, 제 부모님은 처음엔 강하게 반대하셨어요. 특히 학원 부원장이셨던 아버지는 “나는 특수교육 발전에는 별 생각 없고, 내 자식이 일 별로 안하고 편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라며 “장애 아이들을 돌보는 건 힘드니깐 일반 학교로 가라”고 계속 말씀하셨어요. 그러다 특수교사가 가르치는 학생 수가 일반교사에 비해 적고, 일반교사에 비해 월급이 조금 더 높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마음을 돌리셨어요.

아버지는 늘 제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고, 저를 아껴주십니다.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하면 걱정된다며 말립니다. 대학을 정할 때도 집과 가까운 곳으로 가라고 했어요. 저는 거리가 좀 멀어도 교육환경이 더 좋은 특수교육과가 있는 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멀리 있는 대학에 가는 건 안 된다. 너 지쳐서 통학 못한다고 할 거고, 기숙사도 불편하다고 했잖니”라며 반대했고, 저는 결국 가까운 대학에 다니게 됐습니다. 간호사인 어머니도 늘 안전을 강조하시고, 튀김요리도 위험하다고 못하게 하십니다.

아버지는 첫째인 저에게 많이 의존하시는 편이에요. 전자기기를 잘 다루지 못하시는데 제가 고3때 갑자기 도움을 청하러 학교로 찾아오신 적도 있어요. 아버지는 문제가 생기면 어쩔 줄 몰라 당황하세요. 그럴 때마다 제가 도와드려야 하고, 아버지는 제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반면 다섯살 아래인 남동생은 집안의 종손인데도 늘 못 미덥다고 하세요. 제 일상에는 관심을 많이 보이면서 동생에게는 별다른 애정을 보이질 않으십니다. 동생도 매번 서운함을 표시하고 때로 거친 말을 쓰고 대들기도 합니다. 너무 저만 아끼시니 동생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어른으로서 부모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저희 부모님은 저나 동생이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께 ‘고마워요’, ‘미안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만만하게 본다고요. “우리가 낸 돈에 서비스가 다 포함돼 있어 그런 말 할 필요 없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훌륭하시고 좋은 분들이시고, 저도 그런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게 죄송스럽지만 성인이 됐는데도 여전히 저를 아이처럼 대하시는 두 분을 보니 제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기분이 듭니다.

정예진(가명ㆍ20ㆍ대학생)


예진씨, 부모가 자식을 잘 키운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걸까요. 먹이고, 입히고, 사랑해주는 기본적인 역할을 넘어 잘 키운다는 것은 자식이 성인이 됐을 때 독립적인 존재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키워주는 게 아닐까요. 그런 관점에서 아버지를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하려면 스스로 판단해 자기 인생의 폭을 넓혀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시행착오를 하고,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상처를 입더라도 스스로 뭔가 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죠. 그런데 예진씨의 아버지는 자식이 상처 하나 안 입고, 고생 없이 편안하게 있는 것만이 행복한 것이고, 사랑이라고 생각하셨을 거에요. 그래서 아버지의 눈 앞에 안 보이는 건 용납이 안 되고 불안했을 거에요. 대학을 보낼 때도 예진씨의 의견을 듣기보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운 곳으로 정해 자신의 눈 앞에 두고 싶어하셨어요. 자식을 더 큰 사람으로 성장시키기보다 품 안에 두길 원하셨던 것 같아요.

그 다음은 자식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데에서도 문제가 있었어요. 범죄를 저지르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삶이라면 안되겠지만 그러지 않은 선에서는 부모는 자식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아르바이트는 세상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돈 버는 게 힘들다는 것도 배워보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그것도 아버지가 생각하는 편안하고 행복한 삶의 기준에는 어긋나기 때문에 예진씨가 원하는 삶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자식이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아갈 내면의 힘을 길러주는데도 미숙했어요. 힘든 일도 해봐야 경험이 되고, 자기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런 과정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이 만들어집니다. 굳이 나쁜 일을 당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살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인생을 발전적인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깁니다.


아버지는 왜 그러셨을까요. 아버지는 내면의 불안 때문이었을 거예요. 자식이 안 보이면 불안하고, 자식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일을 할 때에 아버지가 불안한 거예요. 자식이 겪어야 할 일을 본인의 것처럼 떠안아 버리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염려하고, 걱정해서 스스로 불안해지고, 그 불안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마음이 불편해지니까 본인이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식을 끌어가는 것으로 불안을 낮추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야 안심이 되는 거지요. 자신의 불안을 스스로 진정시키지 못하고 자식에게 떠안기는 거지요. 그래서 늘 자식에게 “그러니깐, 넌 하지 마”라고 하게 됐을 거에요.

아버지는 불안이 의심의 형태로 많이 표현되는 분이에요. 세상에 대한 의심도 많고,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특성이 있어요. 그래서 불안이 커지면 남을 부르지 못하고, 본인이 제일 믿는 예진씨를 불러서 불안을 해결하려고 했을 거에요. 일반적으로 잘 이해가 안되지만, 컴퓨터 문제로 갑자기 학교에 있는 고3딸을 불러낸 것도 아버지의 불안이 원인이었을 거에요. 문제가 생기고 해결이 빨리 안 되면 본인이 너무 당황스러워지고, 당황스러운 자기 감정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 예진씨를 불러내서 해결하는 거지요. 그건 딸에게 의존했다기보다 아버지의 불안을 딸에게 전가한 거예요

집과 가까운 대학을 가라고 한 이유도 자식이 눈 앞에 안 보이고, 장거리 통학을 하는 데 대해 미리 염려하고 불안해서 반대하는 부분도 있지만, 본인이 불안해서 그런 이유도 있었을 거예요. 부모가 불안해서 불안을 낮추기 위해선 믿을만한 딸이 늘 곁에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불안해서 그런다’고 하면 되는데 ‘너 잘되라고 하는 얘기다’라고 하기 때문에 예진씨가 부모가 잘 이해되지 않았을 거에요. 아버지는 예진씨의 얘기에 공감을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의견을 주로 제시했어요.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게 본인이 가장 안전하고, 덜 불안해서죠.

동생에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예진씨와 달리 동생이 아버지 내면의 불안을 계속 건드리기 때문일 거에요. 동생은 아버지가 불안하지 않게 이 방향으로 가줬으면 하는 걸 잘 따라주지 않고, 통제가 잘 되지 않아서 아버지를 불안하게 해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들이 불편한 거지요. 아주 사소한 것에서 불안이 유발되고, 그러면 의심하게 되고, 불안이 증폭됩니다. 동생의 아주 사소한 말과 행동이 아버지의 불안을 자극하고, 그러면 아버지는 불안이 증폭돼 아들이 하는 모든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 겁니다. 겉으로 보기엔 편애지요. 하지만 편애의 문제는 사랑을 받는 사람도 괴롭다는 겁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할까 봐 걱정이 생기고, 덜 예뻐하는 형제에게 미안해지죠. 그러면서 부모의 뜻을 거스르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예진씨, 부모가 당신을 아이처럼 대하는 것은 결국은 본인의 불안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불안이 아니라 아버지의 불안이고, 아버지의 인생에 기반한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요구를 안 들어주면 아버지가 힘들어하고, 당신이 나쁜 사람으로 비춰지니깐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당신이 맞춰주고, 따를 수밖에 없었을 거에요.

하지만 예진씨가 원하는 삶은 아니잖아요. 당신은 당신 나름의 인생의 경험이 있고, 좋아하는 게 있고, 판단하는 게 있을 거에요. 누구나 성장하면서 부모와 멀어지고, 부모의 싫은 점과 좋은 점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거리가 생기고, 부모의 싫은 점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부모로부터 진정 독립을 하는 겁니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그 과정에서 과도하게 부모에 대해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요.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라는 얘기가 절대 아닙니다. 다만 부모의 의견에 반하는 것에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버지가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 다음은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아버지와 의견이 맞지 않을 때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합당하게 해결해야 합니다. 부모의 의견은 무조건 따라야 할 게 아니라, 참조해서 타당하게 스스로 결정하는 거예요. 그런 과정에서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해 나갈 수 있어요. 물론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아서 후회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100% 행복하고 만족하진 않더라도 그런 방향으로 힘을 길러가는 게 스스로 살아가는 독립적 삶이 아닐까요. 당신이 스스로 삶의 기준을 얻어보려고 노력해왔듯이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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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