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관련해 두 번째로 많은 피해자(833명ㆍ지난해 10월 기준)를 낸 ‘가습기메이트’ 제조·판매업체 대표들이 1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제품 원료와 폐질환 사이의 인과관계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게 무죄 이유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유영근)는 12일 업무상과실치사ㆍ치상 혐의로 기소된 안용찬(62) 전 애경산업 대표와 홍지호(70) 전 SK케미칼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실상 같은 제품을 ‘이플러스 가습기 살균제’라는 PB(자체개발) 상품으로 판매한 이마트 관계자들과 애경산업 협력업체 임원들까지 13명 전원에게 무죄 판결이 났다.
재판부는 가습기메이트가 유죄가 확정된 옥시레킷벤키저(옥시) 제품과 성분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습기메이트는 클로로메칠이소치아졸리논(CMIT)ㆍ메칠이소치아졸리논(MIT)이 원료지만, 옥시 제품은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으로 제조됐다. PHMG와 폐질환 사이의 인과관계는 CMITㆍMIT보다 먼저 인정돼, 신현우 전 옥시 대표는 2018년 징역 6년이 확정됐다. 애경산업과 SK케미칼은 위해성 자료가 쌓인 뒤인 2019년에야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부는 “현재로선 CMITㆍMIT 성분은 PHMG와 달리 인과관계가 확인 내지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특히 기존 연구를 정리한 환경부 종합보고서에 대해 "인과관계를 증명하지 못한 기존 연구결과에 대한 전문가들의 추정 내지 의견을 제시한 의견서"라며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입증될 것을 요구하는 형사재판에선 추정에 의해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재판부는 ‘인과관계가 입증됐다’는 취지의 전문가 진술도 “형사재판에선 차용할 수 없는 견해”라고 밝혔다. 증인으로 출석한 전문가 중 일부는 “사망이나 상해 결과는 사람에게 이미 발생했다. 설령 동물실험에서 인과관계를 인정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에게도 사망 또는 상해의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재판부는 “이 증언은 결국 인과관계를 뒷받침할 만한 동물실험이 나오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은 취지”라고 해석했다. 이어 “실제 실험도 ‘인과관계가 있다’는 가설에 부합하지 않으면 농도를 비현실적으로 올리거나 실험 조건을 변경해 진행했다. 연구자들의 편향이 개입될 여지가 충분한 실험이었다”며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정부의 피해 인정 기준을 형사사건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선을 긋기도 했다. 재판부는 “정부의 피해인정 기준은 PHMG 피해 사례로부터 도출된 것으로, 이 사건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피해 인정 절차는 ‘피해 구제’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넓게 피해자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운영된 것으로, 엄격한 증명을 필요로 하는 형사사건에선 그대로 차용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인과관계가 인정됐음을 전제로 하는 나머지 공소사실, 즉 ‘업무상 주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혐의에 대해선 더 살펴볼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재판장은 판결 도중 잠시 한숨을 내쉰 뒤 “바라보는 심정이 안타깝고 착잡하기 그지없다”는 소회를 밝혔다. 재판부는 “항후 추가 연구결과가 나오면 (오늘 선고가)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르겠지만, 재판부 입장에선 현재 증거를 바탕으로 형사사법의 근본 원칙 범위 내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며 선고를 마무리했다.
피해자들은 선고 이후 “내 몸에서 일어난 일이 다 증거인데, 그조차 인정 못 하는 사법부가 가해 기업”이라며 절규했다. 이들은 “이 억울함은 풀고 가야겠다. 2심에서 결과가 뒤집힐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판부는 이날 PHMG를 옥시 측에 공급하며 독성을 축소 기재하고 원료를 적극 추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최기승 전 SK케미칼 스카이바이오 팀장 등 4명에게도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최 전 팀장이 제품 출시 당시 관여하고 적극 추천했다는 사실은 입증되지 않았고, 독성 기재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다소 부주의가 있었으나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 및 상해에 본질적 기여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날 판결에 대해 “1심 법원은 동물 실험 결과와 인체 피해의 차이점을 간과하고, 전문가들이 엄격한 절차를 거쳐 심사한 피해 판정 결과를 부정했다”고 반박했다. PHMG 원료 공급 사건에 대해서도 “PHMG를 판매하는 과정에서 SK케미칼이 독성 수치를 숨기고 허위 기재한 사실 등이 충분히 입증됐음에도 형사책임을 부정했다”며 “두 사건 모두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SK케미칼 측은 선고 직후 “법적 책임 유무를 떠나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통이 해소될 때까지 성실히 책임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