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사지 않을 권리]<1>화장품
세계를 뒤덮는 기후 위기 속에서, 우리 주변의 쓰레기 더미는 당장이라도 한국을 삼킬 기세다.
오늘도 각 가정은 철저한 분리배출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배달 음식 그릇을 씻고, 세제통의 스티커를 떼고, 화장품 용기 내부에 물을 부어넣어 세척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는 와중에 의문과 분노가 고개를 든다. 애초에 왜 이렇게 만드는 것인가.
한국일보 기후대응팀은 2021년 신기후체제 출범(파리협정 시행 원년)을 맞아 소비재 포장 문제를 생산자 책임의 관점에서 짚어보는 시리즈를 마련, 격주로 연재한다. 플라스틱 포장재 등은 쓰레기로 버려질 때의 환경 오염 뿐만 아니라, 만들 때에도 소각할 때에도 탄소가 배출된다. 과대포장을 지속하는 기업들의 무감각과 이를 방관하는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것은, 기후 위기와 쓰레기 문제를 푸는 첫 매듭이다.
한국일보는 첫 분석 대상으로 화장품을 골랐다. 재활용 봉투에 넣을 때 마치 돌덩이처럼 무거워서 소비자의 마음까지 짓누르는 화장품 통들.
겉모양은 도자기처럼 곱다. 한국일보가 실험을 위해 확보한 제품들만 봐도 투명하고 은은한 호박색과 진보라색, 담청색의 아름다운 용기들이다. 이 예쁜 용기들을 자르고 속을 들여다보면 무엇을 보게 될까.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위해 아름답고 고급스럽게 만든 용기일수록, 재활용과 쓰레기 문제에서 바라볼 때는 가장 추한 모습을 드러냈다.
화장품 빈병, 담고 있는 내용물의 5배 무게
실험을 위해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기초 화장품 6가지를 무작위로 골랐다. 선택한 제품은 ①엘지생활건강의 '비욘드 엔젤 아쿠아 시카 카밍크림 앰플' ②이넬화장품의 '입큰 맨 파워액티브 올인원 크림' ③네이처리퍼블릭의 '진생 로얄 실크 워터리크림' ④한율의 '달빛유자수면팩' ⑤로벡틴의 '스킨이센셜즈 배리어 리페어 멀티 오일' ⑥토니모리의 '바이오 이엑스 셀 펩타이드 에멀전'. 모두 길거리 화장품 가게에서 쉽게 구할수 있는 제품들이다.
몇몇은 손으로 가늠해 봐도 꽤나 묵직했다. 플라스틱의 무게가 어느정도인지 확인해봤다. 제품 전체의 무게를 측정한 뒤, 내용물을 덜어내고 공병만 남았을 때 무게를 다시 쟀다.
가장 무거운 제품인 ③번은 총 무게가 351g인데, 이중 공병 무게만 293g으로 전체의 83.5%에 달했다. 용기의 무게가 내용물 크림의 5.05배에 이른다. 이 제품은 정가가 13만2,000원. 무게 비율로만 보면 약 11만원이 플라스틱 가격인 셈이다.
④번은 플라스틱 용기의 무게가 121g으로 내용물보다 1.86배 무거웠다. ⑥번과 ②번은 각각 공병 무게가 156g, 125g으로 전체 무게의 절반(55.7%, 50.8%)을 넘었다. 이어 ①번은 빈병이 전체 무게 중 차지하는 비중이 43.1%, ⑤번은 41.8%였다.
즉 실험 대상 대부분에서 플라스틱의 무게가 내용물의 무게보다 더 나갔다.
2중, 3중 겹겹이 플라스틱... 돈 주고 플라스틱을 샀나
빈 용기가 대체 왜 이렇게 무거운 걸까. 서울 을지로의 공업사를 찾아 단면을 자르고 확인해보니 실마리가 풀렸다.
단지 모양 화장품 용기는 플라스틱 덩어리의 두께가 1cm를 넘는 경우는 예사였으며, 3cm에 육박하는 제품도 있었다. ③번의 경우, 용기의 두께가 무려 1.8㎝. 겉용기(1㎝) 1개와 속 용기 2개(각각 0.2㎝)를 모두 끼워맞춘 뒤 용기 사이 빈 공간까지 합쳐 측정한 결과다. 용기 두께가 높이(5.6㎝)의 3분의 1, 너비(7.9㎝)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너비에서 용기 두께는 양쪽을 합쳐 두번을 들어가기 때문에, 사실상 너비의 절반이 플라스틱 덩어리인 셈이다. 또 가장 넓은 모서리를 기준으로 측정하면 두께는 2.9㎝나 됐다.
특히 ①번과 ⑤번 두 개 제품을 빼고는 모두 속 용기가 따로 있었다. 물론 ②번 처럼 "펌프시 공기압을 이용해 내용물을 끝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이넬화장품 관계자의 설명) 하는 등 나름의 이유가 있는 제품도 있다. 하지만 ③번은 뚜껑만 열면 바로 제품 사용이 가능한데도 무려 3겹이다. 마치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이 반복해서 들어가는 러시아 민속인형 마트료시카 같은 구조다. 속 용기만으로도 제품을 담는데는 충분하지만, 그보다 2~3배 많은 플라스틱을 사용한 것이다.
용기가 여러 겹일 수록 두께도 단연 두꺼워졌다. 홑겹인 ①번과 ⑤번의 두께는 각각 0.3㎝, 0.2㎝. 그러나 비슷한 원통형임에도 두 겹인 ②, ⑥번의 두께는 각각 0.5㎝다. 속 용기 두께(0.1㎝)와 겉 용기 두께(0.4㎝)를 합한 결과다. ②, ⑥번은 너비(4.8㎝)에 비해 두께가 차지하는 비중이 9분의 1 정도로 크지 않았다. 하지만 ⑥번 제품은 뚜껑도 이중 구조라 뚜껑 두께가 1.6㎝나 됐다. 이 수치로 따지면 두께가 너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셈이다.
납작한 항아리모양인 ④번의 두께는 1.3㎝. 겉 용기의 두께만 1㎝였다. 용기 두께가 높이(5㎝)의 4분의 1을, 너비(7.6㎝)의 6분의 1을 차지했다.
이뿐만 아니다. 꼭 없어도 되는 내용물을 뜨는 용도의 작은 숟가락 모양 스패츌러, 겉뚜껑 안에 자리잡은 얇은 속뚜껑, 스포이드 등. 위생과 편리함을 명목으로 더해진 도구가 모두 플라스틱이었다.
분리배출 표시 있지만, 6개 제품 모두 재활용 불가
모두 재활용이 완벽하게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막대한 양의 플라스틱을 쓰는 것일까. 실제 실험 제품 용기 모두에 '분리배출 가능' 표시가 있다. '재활용의무대상' 이라는 뜻이다. 플라스틱이 많이 들었다 해도 재활용이 잘 된다면, 괜찮을수도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6개 제품 모두 사실상 재활용이 불가했다.
제품의 재질부터 재활용과는 거리가 멀다. 6개 용기 중 ①, ⑤번을 제외한 4개의 재질이 아더(other), 즉 다중 또는 합성 플라스틱이다. 이 경우 공정을 거쳐 다른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물질재활용이 불가능하다. 보통 같은 재질의 플라스틱끼리 모아 재활용을 하는데, 아더 플라스틱은 합성된 종류와 비율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⑥번의 경우 업체는 "재활용이 불가한 일부분을 제거하면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해명했지만, 선별업체에서는 이런 복잡한 구조를 알 길이 없으니 "사실상 애물단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분리배출이 가능하다고 써있을까? "엄밀히 따지자면 같은 제품끼리는 재활용이 가능은 하다는 뜻인데, 선별장 여건과는 괴리가 있습니다." 한 재활용선별업체 관계자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국내 화장품 회사인 아모레퍼시픽, 해외 브랜드인 맥·키엘 등은 자사 제품 공병을 수거해 이를 다시 제품 생산에 쓰는데, 이렇게라면 아더 용기도 부활할 수 있다. 똑같은 합성 플라스틱끼리 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시행하는 회사는 손에 꼽는다.
나머지 두 개 제품은 페트(PET) 재질. 하지만 역시 재활용이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 페트라는 이름에서 투명 음료수병이 떠오르지만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홍수열 자원순환경제연구소장은 "⑤번은 투명하지만 외면에 바로 글씨가 인쇄돼있고, ①번도 글씨와 색깔이 입혀졌다"라며 "두 제품은 결정화를 거친 C-페트나 약품을 사용한 G-페트일 수 있는데 눈으로는 구분이 어려워 재활용 업체에서는 대부분 골라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페트 용기들은 재활용이 가능한 투명 페트병(A-페트)과 섞일 경우 오히려 재활용을 방해한다.
씻어서 분리수거 하라더니, 씻을 수도 없게 만들어
만약 여건이 개선돼 재활용이 된다해도, 그 전제조건인 세척조차 쉽지 않다.
오염된 플라스틱을 그대로 버리면 선별 및 분쇄과정에서 다른 플라스틱과 섞여 전체적인 재활용률을 낮춘다. 때문에 세척이 필수인데, 화장품은 유분 및 다양한 성분의 화학물질이 들어있기 때문에 더욱 세심하게 닦아 버려야 한다.
하지만 시중에 판매되는 대부분의 화장품 용기는 입구가 작거나 아예 열리지 않아 완전한 세척이 어렵다. 아더 플라스틱의 재활용도를 높이는 기술이 개발되거나, 아니면 용기 자체가 재활용 가능한 소재로 바뀌더라도, 디자인 변화 없이는 재활용률이 개선되지 않을거란 얘기다.
입구가 넓은 ③, ④번은 비우고 세척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긴 원통에 펌프가 달린 ②, ⑥번은 수차례 펌프질에도 내용물이 다 비워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결국 마개를 돌려 입구를 열고 병을 흔들어 내용물을 다 비웠는데, ⑥번의 경우 매우 꽉 잠겨있어 마개를 여는 데만 오랫동안 힘을 들여야 했다. 펌프용 화장품 용기 상당수가 이렇게 제대로 열리지 않는 구조여서 소비자들이 세척을 포기하고 버리는 경우가 많다.
세척을 위해 용기에 물을 넣는것도 쉽지 않았다. 대부분 입구 지름이 1.5㎝보다 좁아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더라도 밖으로 흘러내리기 일쑤였다. 특히 ⑤번 제품의 경우 입구가 바늘구멍처럼 좁았는데, 마개를 칼로 제거하지 않는이상 도무지 물을 넣어 닦기 어려운 구조였다.
'재활용 어려움' 표시도 면제받은 화장품
화장품을 사는 소비자들은 결국 '크고 예쁜 쓰레기'를 함께 구매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돈 낭비를 넘어선 문제다. 화장품은 소비자가 사용 후 버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3~6개월로 짧아 필연적으로 다른 소비재에 비해 더 많은 폐기물이 발생한다. 여기에 과대포장이 더해지면 플라스틱 폐기물의 양은 배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제품 생산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화장품 업계에서는 용기 디자인이 브랜드 이미지와 매출로 직결된다는 인식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네이처리퍼블릭의 관계자는 ③번의 3중 구조와 두께에 대해서는 "내부 방침상 구체적인 답변이 어렵다"면서도 "현 디자인은 제품 정보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소비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정부가 나서야 하지만, 오히려 환경부는 적극적으로 면죄부를 주고 있다.
환경부는 올해 3월부터 소비재 포장재질의 재활용 용이성을 평가해 '최우수, 우수, 보통, 어려움' 등 4등급으로 나눠 표시할 예정이다. 한국포장재재활용사업공제조합에 따르면 시판 화장품의 90% 이상이 '재활용 어려움' 표시 대상이다. 하지만 환경부는 화장품에 대해서는 제조사가 '2025년까지 생산된 제품의 10%이상을 역회수해 재활용하겠다'는 협약에 참여할 경우 등급 표시 예외를 인정하기로 했다.
화장품 업계는 비용 문제를 든다. 대한화장품협회 관계자는 "국내 화장품 회사들은 현재 내수용과 수출용을 구분하지 않고 생산하는데 분리배출 등급 표시가 될 경우 수출의 70%를 차지하는 중국과 표기가 달라 생산라인을 이원화해야 하고 큰 비용이 든다"며 "표기가 달라지면서 해외에서는 짝퉁(가짜) 제품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위험 부담도 있다"고 설명했다.
화장품 업계는 역회수를 통해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환경단체는 반발하고 있다. 허승은 녹색연합 활동가는 "재활용 가능 여부는 화장품 소비자들이 당연히 제공받아야 할 정보이기 때문에 역회수 제도와 거래할 대상이 아니다"라며 "등급을 표시하는 것은 물론 역회수된 공병의 의무 재활용량도 정하는 등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비자들 "기업 먼저 변해야"
소비자들은 이같은 진실을 모른 채 지금도 화장품 용기 분리배출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6월 서울YWCA가 여성 8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83.3%(666명)는 다 쓴 화장품 용기를 분리수거하고 있었다. 이중 내용물을 직접 세척해 재활용 수거함에 넣는 경우는 46.2%(308명), 라벨ㆍ고무마개 등 부산물까지 일일이 분리해 철저하게 폐기하는 경우도 11.4%(76명)나 됐다. 환경을 위해 자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지만, 십중팔구는 무용지물인 셈이다.
유리 용기에 담긴 화장품만을 구매하는 수고를 감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역시 재활용이 어렵긴 매한가지다. 홍 소장은 “유리는 백색ㆍ녹색ㆍ갈색 종류만 재활용이 가능한데 화장품 용기는 디자인을 생각해 금색ㆍ보라색 등 다양한 색을 합성한다”며 “투명 유리에 제거 가능한 필름을 덧붙인 경우가 아니라면 모두 재활용이 안 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회사원 김미선(33)씨는 "화장품 공병을 분리배출하면서 '세척이 참 어렵다'고 느꼈지만 재활용이 안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며 "그동안 들인 노력이 허무하다"고 말했다. 회사원 박민혜(31)씨는 "이중 삼중의 용기를 보니 그동안 나도 모르게 버린 과대포장 화장품이 얼마나 많을까 싶다"며 "기업이 환경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바꿔야 해결될 문제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