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멘토와 롤모델

입력
2020.12.20 14:00
21면

편집자주

클래식 거장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정명훈이 선택한 신예 피아니스트 임주희가 격주 월요일자로 '한국일보'에 음악 일기를 게재합니다. <끝>



'오디세이'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충실한 조언자 이름에서 유래한 ‘멘토’라는 말은 지혜와 신뢰로 누군가의 인생을 이끌어주는 지도자, 스승, 상담자라는 뜻이다. 나의 멘토는 누구일까? 당연히 지금까지 내 음악인생과 함께한 선생님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래서 '어느 선생님께 무슨 레슨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하지만 그분들이 멘토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레슨 내용 때문만이 아니다. 선생님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온 음악인생을 배우고 있다. 그분들의 가르침대로 연주를 한다고 해서 그들을 닮아가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최근 감명 깊게 본 영화는 ‘두 교황’이다. 액션영화와 어드벤쳐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왜 이 영화에 몰입됐을까. 안소니 홉킨스, 조나단 프라이스가 맡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교황 프란치스코 역할의 진실한 연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도 분장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노장의 눈빛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멘토 선생님들로부터 그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배웠다. 지금의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세상이다. 선생님의 주름이 느는 만큼 내 음악은 깊어진다. 그분들의 얼굴을 그리는 일은 힘들다. 주름을 보는 내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하루는 피아노를 전공한 친구가 내게 "자신의 롤모델"이라며 학교 시험기간인데도 내 연주를 보러 왔다고 말 한 적이 있다.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나의 롤모델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다. 내게는 여러 롤모델이 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 김선욱, 선우예권, 문지영이다. 모두 내게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선배 피아니스트들이다. 그들은 이미 롤모델이었다. 그들의 연주를 접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내게 이미 음악적 롤모델이었던 것이다.



지난 9월 일주일 새 강원 원주를 세 번이나 다녀왔다. 손열음 언니가 독일로 출국하기 전 내게 음악적 조언을 해주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다. 슈퍼스타 같은 연주자와 함께 한다는 사실은 늘 흥분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언니가 거쳐온 음악인생을 내가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지난 1월에는 선우예권 오빠와 신년음악회에서 한 무대에 섰다. 후배의 무대 경험까지 챙겨준 꼼꼼한 배려에 너무나 감사했던 기억이 있다. 김선욱 오빠는 코로나로 연주가 취소되는 상황에서 후배를 위해 비밀 연주회를 열어줬다. 그의 연주에 목말라하는 후배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연주였다. 문지영 언니는 늘 공연장이나 사석에서 후배 피아니스트가 아닌 동생 같은 존재로 대해준다. 언니의 따스한 마음이 음악에도 어려있어 나는 언니의 음악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임주희의 건반노트' 마지막 페이지에는 감사한 이들의 이름을 써보고 싶었다. 결국 나는 홀로 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도움이 나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음악에는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내가 그들을 존경했듯 나를 바라볼 후배들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코로나19가 끝나고 무대에서 만날 날을 고대하며, 언젠가 뉴욕에서의 학교 생활 소식을 전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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