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대학가와 평화에 목숨 바친 청년 공간 잇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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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8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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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부산 남구 ‘청년 평화의 길’


지난 16일 오후 부산 남구 대연동 UN조각공원. 적지 않은 이들이 차가운 공기를 녹이는 햇살을 쬐며 공원 안에 난 길을 따라 걷는다. 더러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한곳에 고정시키고, 어떤 이는 팔짱을 낀 채 깊은 사색에 잠긴다. 어떤 이는 휴대폰을 꺼내 든다.

이들을 붙잡아 세운 것은 산책로를 따라 줄지어 선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이다. ‘인간과 우주와의 평화의 장’, ‘평화의 탁자’, ‘이념의 화합’, ‘통일을 위한 분투’, ‘화해' 등 수십 점이 공원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인근에서 산보 나온 한 주민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에 대해, 도심 복판에서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부산 남구에는 ‘청년 평화의 길’이 있다. 부산도시철도 경성대ㆍ부경대역에서 도보로 1~2시간 안에 돌아 볼 수 있는 3~4㎞ 가량의 구간이다. 이 길에는 UN조각공원을 비롯해 UN기념공원, 평화공원, UN평화기념관,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등이 포진해 있다. 경성대와 부경대, 동명대 등 대학들이 몰려 있어 부산을 대표하는 대학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알듯 말 듯 한 ‘청년 평화의 길’ 이름은 다소 묘하다. ‘청년’이라는 단어와 전쟁에 반하는 ‘평화’라는 단어가 하나의 길 이름에 배치된 탓이다. 두 단어는 이 길에서 느낄 수 있는 '현실'과 '과거'를 묘하게 뒤섞은 조합이다. 젊은이들이 넘치는 대학가와 한국전쟁에 참전해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청년 장병들을 기념하는 공간들이 길을 통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청년의 공간을 거닐다


‘청년’은 우선 부산도시철도 경성대ㆍ부경대역에서 시작한다. 경성대와 부경대 사이 거리에는 부산을 대표하는 대학가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 있다. 유명 맛집을 비롯한 식당, 주점 등이 즐비하다. 하루 유동인구가 수만명에 달한다. 활기 그 자체의 공간이다.

대형 프랜차이즈에서부터 저마다의 개성과 끼가 넘치는 가게와 상점이 남녀노소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음악과 연극 공연이 연중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2004년 건축가 최윤식이 주택가 집을 한 채 사서 음악 레스토랑을 만든 뒤 2007년 인접한 주택 네 채를 추가로 사들여 만든 ‘대연동 문화골목’으로 들어서면 분위기는 또 반전한다. ‘별천지가 있다면 이런 곳일까.'

소극장, 꽃집, 와인바, 갤러리, 라이브카페, 식당 등 서로 다른 성격의 가게들이 따로 또 같이 조화를 이루며 행인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서울에서 이 곳을 찾은 이성민(37)씨는 “일반 상가 시설과는 달리 문화와 예술이 함께 녹아 있는 이 느낌이 좋아 부산에 올 때마다 이 골목을 서성인다”고 했다.

해마다 열리는 ‘골목 건축제’와 발길이 맞닿으면 각계각층 유명 인사들이 참여하는 강연을 듣는 행운도 가질 수 있다. 또 부경대 북쪽 담장을 허물고 만든 ‘향파문학거리’를 거닐다 보면 하얀 울타리에 향파 이주홍 선생의 시, 소설, 희곡 등 작품에 등장하는 한 대목을 음미하면서 사색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을 누릴 수 있다. 향파는 부산지역 문학의 토대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작가로 부경대(당시 부산수산대) 교수를 지냈다.


평화의 구역으로 걸어 들어가다


대학가를 걸으며 부경대 정문을 지나 1㎞ 가량, 20분 정도 더 걸어 가면 UN조각공원을 만난다. 여기부터 ‘평화’의 구역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UN조각공원은 인근에 있는 UN기념공원을 국제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해 부산시가 공을 들인 공간이다. 지난 2001년 ‘한국전쟁 50주년 특별기획 UN기념공원 국제조각 심포지엄’에 참여한 한국전 참전 21개국의 조각가 34명이 기증한 작품들이 도열해 있다.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룩셈부르크, 인도, 터키, 태국 등 저마다 국적이 다른 작가들이 자유, 평화, 통일 등의 추상을 조각으로 형상화 한 것들이다. 공원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곳과 맞붙어 있는 UN기념공원까지는 도보로 15분이면 충분하다. 한국전에 참전해 세계 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유엔군 전몰 장병 11개국 2,300여구의 유해가 안치된 공원으로,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 타이틀이 붙어 있다.

당시 숨진 대부분의 장병은 20세를 전후한 청년. 1951년 처음 조성된 뒤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1955년 UN에 영구 기증하고, 성지로 지정받았다. 공원 안의 많은 상징물 중에서도 정문과 추모관은 한국 건축계의 거장 김중업 선생이 1966년 설계한 것이다.

계급에 따라 묘역의 크기를 달리하는 다른 국내 국립묘지와 달리 모두 같은 크기의 묘역을 배정, 평화 수호를 위해 싸운 용사들을 동등하게 기리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묘역을 둘러 보고 있던 부산시민 김정민(49)씨는 “이억 만리의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이라는 곳에 와서 목숨을 바친 각국의 청년들을 생각하면 숙연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청년 장병들이 잠든 곳. 이 길은 ‘평화의 길’인 동시에 ‘청년의 길’이기도 한 셈이다. 이 길을 ‘청년 평화의 길’이라고 명명한 배경이다.


반경 1㎞ 모든 공간과 연결


UN기념공원의 정문을 기준으로 500m가량 더 가면 평화공원이 나온다. 2005년 APEC 정상회의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3만여그루의 나무와 생태연못, 잔디관장, 바닥분수 등 자연 친화적인 공간을 거닐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바닥분수 덕에 무더운 여름철이면 인기 물놀이 장소로 변신한다.

길을 너무 많이 걸었다 싶으면 UN평화기념관을 찾으면 된다. 평화공원에서 다시 UN기념공원 정문 쪽으로 걸어 올라와 UN기념공원 정문 맞은 편 쪽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UN평화기념관에 다다른다. 이 거리는 1㎞ 정도로 10여분 정도 걸린다.

UN평화기념관은 한국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숭고한 희생을 치른 유엔군을 추모하기 위해 2014년 문을 열었다. 일종의 역사관으로, 한국전쟁실과 UN참전기념실, UN국제평화실 등의 상설 전시실을 두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의 모습, 참전군의 유물, UN 활동상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청년’과 ‘평화’를 보고 느끼는 모든 공간들과 연결되는 길이 UN조각공원 기준으로 반경 1㎞ 안에서 걸쳐 있는 셈이다.

일제 감점기 강제동원의 실상을 비롯해 인권과 세계 평화의 필요성 등을 알리기 위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도 이 반경 안에 있다. 2015년 개관한 이 역사관에 오르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에 있었던 사물들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강언희 부산 남구 미래전략2팀장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부산의 대표적 대학가의 모습에서부터 한국전쟁의 참상, 전 세계 청년 장병들의 희생, 평화의 소중함 등을 느낄 수 있는 길이 바로 ‘청년 평화의 길’”이라고 말했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보행로 체계


부산 남구는 지난 8월 ‘청년 평화의 길 사인(sign)체계 및 디자인 구축사업’을 완료해 대학로와 UN기념공원 일대를 걸어서 더욱 쉽게 찾을 수 있는 보행체계를 만들었다. 지난해 6월부터 1년 2개월 가량에 걸쳐 진행한 사업이었다. 경성대와 부경대, 평화공원, 동명대, UN기념공원, 도시철도 2호선 대연역 일원에 25개소의 안내 사인물이 설치됐다.

일정 구역의 보행체계를 종합적으로 디자인한 것은 이곳이 부산에서는 처음이다. 위치 별로 번호를 부여해 현재 위치나 경로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했고, 한국어 뿐 아니라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병기해 외국인 관광객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또 사인물에 있는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인식하면 남구 문화관광 홈페이지로 이동해 UN평화문화특구와 해당 기관이나 장소의 상세한 정보를 볼 수 있다.

박재범 남구청장은 “많은 분들이 UN기념공원을 비롯한 주변 역사문화 시설들을 편리하게 찾도록 길을 안내하는 체계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며 “길을 걸으며 세계평화특구 부산 남구를 알아 가는 분들이 많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 권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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