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필리버스터가 등장했습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등을 두고 여야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야당이 또 한 번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 들었는데요.
국회 선진화법으로 물리적 충돌은 피하면서도 소수당이 다수당의 입법 추진을 막을 방법은 현실적으로 필리버스터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공수처의 운명이 이르면 9일 정기국회 본회의 또는 10일로 예정된 임시국회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가운데 야당인 국민의힘은 마지막으로 필리버스터에 나섰습니다.
공수처장 후보 추천 시 야당의 비토권을 막는 법안으로, 본회의에서 처리되면 공수처 출범 속도는 한층 빨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공수처가 문재인 정부의 숙원 사업이고 몇 년 동안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슈인 만큼 국민의힘이 가만히 있을 리 없죠.
공수처뿐 아니라 권력기관 개혁 법안과 경제 3법 등 민주당이 정한 핵심 법안들 모두 이번 본회의에서 치열하게 다뤄질 것으로 보입니다. 21대 첫 정기국회의 입법 성적이 이번 대결로 결정되기 때문이죠.
필리버스터가 대체 뭐길래 여야의 입법 전투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이슈가 됐을까요?
대중이 필리버스터 하면 쉽게 떠올리는 건 4년 전인 2016년 더불어민주당의 모습일 겁니다. 19대 국회 임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던 2월 다수당이었던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밀어붙인 테러방지법안이 국회 본회의에 직권 상정됐습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표결 저지를 위해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냈습니다.
필리버스터란 쉽게 말해 거대 정당에 의석 수에 밀려 투표로 법안을 막을 수 없을 때 쓰는 지연술인데요. 야당 입장(다수당이 여당이고 소수당이 야당일 경우)에선 여당이 처리하려는 법안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며 여론전을 펼칠 수 있습니다.
2016년 2월 23일부터 시작된 민주당의 필리버스터는 김광진 의원이 출발선을 끊었습니다. 이후 3월 2일 당시 원내대표였던 이종걸 민주당 의원의 발언으로 끝이 났죠. 9일간 38명의 민주당 의원이 참여한 필리버스터는 192시간 27분 동안 진행됐는데, 세계 최장 기록이었죠. 마지막 발언자였던 이 전 원내대표는 12시간 31분이란 개인 최장 발언 기록도 세웠습니다.
법안 통과를 막지는 못했지만 당시 민주당과 정의당의 필리버스터는 화제를 모았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주말에도 이례적으로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직접 보겠다며 줄을 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죠. 정치권에서는 화장실도 안 가고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버텼는지 등 갖가지 뒷얘기가 만들어졌고, 민주당과 정의당의 정당 지지율이 오르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죠.
사실 우리나라에서 필리버스터가 처음 등장한 건 1964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동료 의원의 구속 동의안을 막기 위해 벌인 것으로, 김 전 대통령은 당시 5시간19분 동안 발언했죠.
필리버스터는 1973년 폐지됐다가 19대 국회 때인 2012년 국회 선진화법이 통과되면서 부활했습니다. 본회의 안건에 대한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요구할 경우 필리버스터는 가능합니다. 더 이상 토론에 나설 의원이 없거나 국회 회기가 종료되거나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찬성하면 필리버스터는 종료됩니다.
필리버스터로 회기가 종료되면 무제한 토론 탓에 처리가 보류된 안건은 다음 회기에 열리는 첫 본회의에서 첫 번째 안건으로 자동 표결 처리됩니다.
필리버스터는 지난해 12월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이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 관련 법안 처리에 반발해 다시 등장했습니다. 당시 한국당은 지연 전술로 본회의에 상정된 199개 안건 모두 필리버스터를 신청했습니다.
애초 선거법 개정안은 27번째 처리 안건이었는데, 야당이 선거법 처리를 막으려고 의사일정 첫 번째 안건부터 필리버스터를 건 것입니다. 민주당과 당시 문희상 국회의장은 한국당의 꼼수를 막겠다며 선거법 개정안을 첫 번째 안건으로 처리 순서를 바꿨죠.
지난해 12월 23일 시작된 필리버스터의 첫 번째 주자는 국민의힘의 원내 사령탑인 주호영 의원이었습니다. 주 의원은 이날 오후 9시 49분부터 발언을 시작해 3시간 59분 동안 발언했습니다.
그런데 역대 세 번째 필리버스터에는 여당 의원들도 동참했습니다. 앞서 3년 전 경험했듯 필리버스터가 국민에게 법안을 설명하는 좋은 기회인 만큼, 맞불 필리버스터 전략을 쓴 겁니다. 두 번째 주자로 나선 김종민 민주당 의원은 주 의원보다 긴 4시간 31분 동안 단상 앞을 지켰습니다.
다만 3년 10개월 만에 펼쳐진 필리버스터는 당시 임시 회기가 사흘 동안 진행된 탓에 지난해 12월 25일 자정에 종료됐습니다. 여야 의원 15명이 참여했고 약 50시간 동안 열띤 토론이 이뤄졌습니다. 선거법 개정안은 다음 회기인 지난해 12월 27일 본회의에서 첫 번째 안건으로 표결 처리됐습니다.
하지만 필리버스터는 선거법을 처리한 직후 다시 재개됐습니다. 민주당이 한국당의 지연술에 말리지 않겠다며 임시국회를 3일씩 쪼개서 열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회기가 종료된 뒤 다음 회기 때 즉시 표결 처리해야 하는 규정을 이용한 건데요. 한국당의 꼼수에 민주당도 꼼수로 맞불을 놓은 것이죠.
지난해 12월 27일 공수처 법안 처리를 두고 여야는 네 번째 필리버스터를 진행했습니다. 김재경 한국당 의원이 첫 주자로 나섰는데요. 다만 앞서 진행된 세 번째 필리버스터로 여야는 물론 국민 모두 피로도가 높았던 터라 네 번째는 상대적으로 짧게 끝났습니다. 다수당의 법안 처리를 막을 수 없는 한계를 실감한 만큼 열기도 식었죠.
27일 오후 9시 26분에 시작된 필리버스터는 날을 넘겨 26시간 34분 동안 진행됐고 13명의 여야 의원이 토론을 벌였습니다. 지난해 12월 29일 자정 네 번째 필리버스터가 끝나고 이튿날인 30일 열린 본회의에서 공수처법은 처리됐습니다.
국민의힘은 9일 공수처법 개정안 외에 △국가정보원법 개정안 △대북전단살포 행위 처벌 규정을 담은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 △5·18민주화운동특별법 개정안 △사회적참사진실규명법 개정안 등 5개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신청했습니다. 공수처법 개정안이 본회의에 상정되는 순간 필리버스터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 필리버스터에 주어지는 시간은 단 하루입니다. 정기국회가 10일 0시에 종료되기 때문인데요. 첫 주자로 4선 중진인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이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