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들려주는 기후변화 이야기

입력
2020.12.05 11:00
12면

편집자주

국립생물자원관 전문가들이 동ㆍ식물, 생물 자원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3주에 한 번씩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여러분은 가끔 주변의 식물이 어떻게 여기에 살고 있는지, 언제부터 이곳에서 자라고 있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으셨을 겁니다. 식물의 분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오해 없이 듣기 위해서는 다양한 배경지식이 필요합니다. 식물마다 가지고 있는 특유의 성격을 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죠. 햇볕을 좋아하는지, 추위에 얼마만큼 강한지, 물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등 식물의 생리적인 특성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의 정확한 식물의 분포와 생육지 환경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후, 지형의 변화에 대한 지식도 식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최근 연구자들은 종이나 집단별로 가지고 있는 DNA의 정보를 분석해 식물의 분포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기도 합니다.

대다수의 동물은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지만 고착 생활을 하는 식물은 이동에 제한이 있습니다. 식물은 자신이 움직이지 못하는 대신 효율적으로 꽃가루나 씨앗을 멀리 보내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진화 과정에서 획득한 종마다의 독특한 씨앗의 이동 방법이 있는데, 이를 식물의 산포법이라고 합니다. 산포법은 식물의 분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정보입니다.



식물의 산포법은 크게 5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단순히 땅으로 떨어지는 중력산포, 동물을 이용하는 동물산포, 바람을 이용하는 바람산포, 물을 따라 이동하는 물산포, 그리고 열매가 익어가는 과정에서 생긴 물리적인 힘으로 튕겨 나가는 기계적 산포입니다. 일부 식물들은 두 가지 이상의 산포법을 복합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중력으로 땅에 떨어진 후에 바람이나 동물에 의해 2차적으로 보다 먼 곳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식물의 산포법 중에서 바람산포, 동물산포, 물(해류)산포는 씨앗을 멀리 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장거리 산포법에 해당합니다. 중력산포와 기계적 산포, 동물산포 중 개미에 의해 이동하는 개미산포처럼 씨앗을 멀리 보내지 못하는 방식을 단거리 산포법이라고 합니다.

인도네시아의 크라카토아섬은 1883년에 대폭발하여 섬의 식물들이 소멸했습니다. 50년이 지난 후에 실시한 연구에서 총 271종류의 식물이 새로이 정착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식물들의 유입 방식을 분석해보니 바람산포(112종), 해류산포(76종) 그리고 동물산포(68종) 순으로 대부분이 장거리 산포법에 의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개미산포, 중력산포, 기계적 산포와 같은 단거리 산포법으로는 바다를 건너 이동하는 것이 힘들며 바다나 강 또는 산맥과 같은 큰 장애물을 짧은 시간에 넘나드는 이동은 주로 장거리 산포법으로 이뤄집니다.

섬에 분포하는 식물 종의 조성이나 유입되는 과정은 섬이 어떻게 생성됐고, 생성된 후 어떠한 환경변화를 겪어 왔는지에 따라 확연히 달라집니다. 우리나라에는 약 3,000여 개의 섬들이 있습니다. 특히 서해와 남해는 섬의 밀도가 높아서 다도해라는 별칭이 있기도 합니다. 다도해 섬들의 생성과정은 대부분 유사합니다. 마지막 빙하기의 최성기에는 지금보다 해수면이 약 140m 정도 낮았기 때문에 다도해는 많은 섬이 모여 있는 지금의 모습이 아닌 험준한 산악지대였을 겁니다. 온난해진 기후로 인해 빙하가 녹아내리고 해수면이 차츰 상승하면서 육지와 분리된 현재의 섬이 된 것이지요.

우리가 보는 다도해의 섬들은 한때는 산악지대를 이루던 산들의 정상부에 해당합니다. 빙하기가 끝이 나면서 식물들도 급속도로 따뜻해진 기후에 반응해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제주도의 남쪽에 분포하던 온대성 또는 난온대성 식물들은 저마다의 산포법과 적응방식으로 한반도까지 북상했을 겁니다.

다도해의 섬들이 육지와 분리된 후에는 참나무과, 꿀풀과, 사초과 식물 등과 같이 단거리 산포법으로 이동하는 식물들은 서남해 섬 지역에서 내륙으로의 이동이 힘들어져 고립된 상태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양치식물, 난초류와 같이 종자나 포자가 미세한 먼지처럼 작은 식물들 또는 새들의 먹이가 돼 장거리 산포가 가능한 식물들은 북쪽으로의 이동을 지속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섬 중에서 다도해의 섬과는 다른 생성과정과 환경적 역사를 가진 대표적인 곳이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제주도입니다. 울릉도와 독도는 바닷속에서 분출된 화산에 의해 형성된 섬입니다. 단 한 번도 육지와 연결된 적이 없는 이러한 섬을 대양섬이라고 합니다.

울릉도는 약 200만년 전에 동해의 깊은 바다에서 분출한 화산에 의해 생성됐습니다. 울릉도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200만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러시아와 일본, 한반도에서 조류(새), 바람, 해류 등에 의해 울릉도로 유입됐을 것입니다. 울릉도의 식물 중에서 참나무류나 싸리류, 석죽과 식물과 같이 단거리 산포법에 의해 이동하는 식물의 비율이 낮은 것은 울릉도가 대양섬이기 때문입니다.

제주도는 울릉도와 비슷한 시기인 150~200만년 전 화산분출로 생성된 화산섬입니다. 그러나 울릉도와는 달리 빙하기 때에는 수심이 얕은 남해가 육지로 변하면서 육지와 연결됩니다. 큰 규모의 빙하기에 접어들면서 온대식물이나 한대성 북방계 식물들이 제주도 일대까지 남하했습니다. 한라산 정상부에 고립되어 있는 눈향나무, 들쭉나무, 시로미, 암매 등의 북방계 식물들이 빙하기에 제주도 일대가 아주 추운 곳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합성명사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식물 이름 중에 '섬'이나 '섬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이 특정 섬에서만 사는 섬지역의 고유식물들입니다. 예를 들면 울릉산마늘, 섬노루귀, 섬기린초, 섬초롱꽃, 섬시호 등 30여 종의 식물은 울릉도에서만 자랍니다. 또 흑산도비비추, 홍도원추리, 홍도서덜취는 홍도와 인근 섬지역에서만 자랍니다. 이런 식물들은 무슨 이유로 섬에서만 자라는 것일까요?

원인은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륙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섬에 정착하고 내륙의 집단과 격리되면서 섬지역의 환경에 맞게 새로운 종으로 진화한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고립된 시간이 길면 길수록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비율이 높습니다.

세계적으로는 하와이섬의 식물들이 이러한 경우입니다. 하와이섬은 약 500만년 전에 태평양의 한 가운데에서 화산폭발로 인해 생성된 섬이고, 하와이섬에 유입된 식물들은 긴 시간에 걸쳐 새로운 식물들로 진화했습니다. 하와이섬의 자생식물 중 약 90%가 고유식물이라고 합니다.

이와 유사한 곳이 우리나라의 울릉도와 독도입니다. 울릉도는 육지와 약 100㎞가량 떨어져 있으며 한 번도 연결된 적이 없습니다. 울릉도에 우연히 유입된 식물들은 내륙의 집단들과 유전적으로 교류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섬노루귀, 섬시호, 섬현삼 등의 울릉도 고유식물의 대부분은 내륙에서 유입된 후, 울릉도의 환경에 적응하여 진화한 식물들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한때 육지와 섬지역에 넓게 분포했지만 육지의 개체들은 다양한 원인으로 모두 절멸하고 섬지역의 집단만 살아남은 경우입니다. 섬지역의 경우 주로 해양성 기후를 보이기 때문에 내륙보다는 기후적인 환경변화의 폭이 비교적 완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나타납니다. 해양성 기후인 울릉도는 연간 최고 기온과 최저 기온의 편차가 내륙지역에 비해 심하지 않습니다. 여름철의 최고 기온이 30도를 잘 넘지 않으며 겨울에도 같은 위도의 내륙보다 추위가 덜하지요. 섬지역에서는 남방계 식물과 북방계 식물이 한 자리에 공존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제주도와 서남해 섬지역에서 미기록 식물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30년간 약 300종의 새로운 식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50% 정도가 이들 도서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이 중에는 속단아재비, 가거양지꽃, 가거개별꽃 등과 같이 우리나라의 고유종인 식물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접국인 일본이나 중국에 분포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식물들입니다.

대표적인 식물이 제주도에서 발견된 제주골무꽃과 홍도에서 발견된 천공사초, 잎꽃돌나물 등입니다. 특이하게 이들의 공통점은 중국의 중남부지역인 안휘성과 저장성 일대에 분포하는 식물이라는 점입니다. 안휘성과 저장성은 상하이시의 인근 지역들로서 제주도와 홍도에서 무려 600㎞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남방계 식물들이 기후온난화로 인해 최근에 유입이 되었을까요? 이들의 열매를 살펴보면 모두 단거리 산포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거리 산포를 하는 식물들이 바다를 건너 제주도나 서남해 섬지역의 숲속에 정착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점입니다.

이들 남방계 식물들 역시 빙하기가 끝이 나면서 서남해 도서가 바닷물에 의해 육지와 분리되기 전인 약 1만2,000~8,000년 전에 유입됐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 시기를 초기 기후최적기로 부릅니다. 초기 기후최적기는 기후가 온난다습한 시기였지만 극지방의 빙하들이 녹아내리기 전이어서 식물들이 내륙지역으로 확산하기 쉬운 시기였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곧 밀려올 바닷물을 피해 높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시기였습니다.

장거리 산포가 가능한 식물들은 짧은 시기에 높은 지대의 내륙으로 이동했지만 홍도원추리, 흑산도비비추 등 이동 속도가 느린 식물들은 1년에 몇 m의 이동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해수면이 차츰 높아져 육지였던 서해와 남해가 6,000~7,000여년 전쯤에 지금의 모습의 바다가 된 것입니다. 육지나 섬지역에 정착하지 못한 식물들은 소멸하거나 멸종했겠지요. 홍도원추리, 홍도서덜취, 흑산도비비추 등 일부 섬지역에서만 사는 이러한 식물들이 겪었을 기후변화와 생존의 장면을 상상해보면 재난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이들 식물은 정말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것입니다. 지금 위치에 홍도나 흑산도와 같은 섬들이 없다면 아마 지구상에서 멸종하고 지금은 볼 수 없는 식물이 되었겠지요.

지구상의 식물들은 20~30차례의 크고 작은 빙하기와 간빙기가 있었던 250만년간의 빙하기(플라이스토세) 동안 이동과 소멸을 반복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종류의 식물들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멸종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식물들은 과거 기후변화와 이에 반응하여 변화되는 적자생존이라는 혹독한 식생변화를 겪으면서 지금껏 살아남은 생존자들입니다. 우리 주변의 식물들은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환경들을 말하며 그 자리에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립생물자원관 김진석 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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