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상자 구멍 손잡이 만세!

입력
2020.11.2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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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마트와 대형 마트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결제 액수다. 동네 마트에 비해 대형 마트에서의 결제 액수는 엄청나게 커진다. 대형 마트가 물건을 비싸게 팔아서는 절대로 아니다. 대형 마트를 찾는 소비자의 자세가 발현되기 때문이다. 대형 마트에 가면 (마치 무슨 법에 명시되어 있다는 듯이) 일단 많이 산다. 또 (갑자기 계시를 받은 것처럼) 예정하지 않았던 물건도 산다.

문제는 집에 가지고 가는 거다. 그 많은 물건을 어떻게 가지고 갈까? 요즘은 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스와 끈, 테이프를 포장대에 쌓아놓았다. 알아서 포장해 가라는 거다. 이때 어떤 박스를 고르셨는가? 나는 본능적으로 외제 물건 상자를 골랐다. 내가 외제 물건에 환장해서 박스마저 외제를 고르는 게 아니다. 외제 물건 상자 중에는 구멍 손잡이가 뚫려 있는 게 많고, 구멍 손잡이가 뚫린 상자가 들기 편하기 때문이다. 무슨 물리적인 계산을 해서 아는 게 아니다. 특별한 경험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아는 일이다.

본 지 정말 까마득한 친구 안진걸 민생연구소장이 어느 날부터인가 "택배 상자에 구멍 손잡이를 뚫어 달라"는 1인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니 이게 뭐 시위를 할 일이야?'란 생각과 함께 '얼라!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 오는 그 많은 택배 상자에는 구멍 손잡이가 없네…'란 반성이 들었다. 집에서 받는 택배는 보통 책이나 옷가지처럼 가벼운 것들이지만 때로는 20㎏짜리 쌀이 오기도 한다.

무거운 상자는 어떻게 나를까? 상자를 양손으로 받치고 든다. 장갑을 끼고 있으면 손이 미끄러워 떨어뜨리기도 한다. 어쩌다 한 번 운반하는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런데 마트 노동자와 택배 노동자는 상황이 다르다. 마트 노동자의 대부분은 40~50대 여성이다. 이들은 평균 10.8㎏의 상자를 하루 평균 403회 들고 내린다. 이들 가운데 70%가 지난 1년 동안 근골격계 질환으로 병원 진료를 받았다. 택배 노동자 상황은 더 심각하다. 올해 작업 중 사망한 택배 노동자만 12명이다.

아무리 본능적으로 아는 일이라도 뭔가를 요구하려면 숫자가 들어 있는 근거를 대야 한다. 그래야 말을 들어 주는 척이라도 한다. '들기지수'라는 게 있다. 들어야 하는 물건 무게를 권장무게한계로 나눈 값이다. 들기지수가 1보다 작아야 허리에 무리가 없다. 상자에 구멍 손잡이를 뚫어 주면 들기지수가 1.24에서 1.12로 줄어든다. 10% 가까이 줄어드는 거다. 구멍 손잡이가 있으면 자세도 교정된다. 결국 허리에 미치는 영향은 40% 가까이 줄어든다.



그런데 여태 왜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뚫지 않았을까? 소비자 핑계를 댔다. 손잡이 구멍으로 이물질이 들어가거나 물건의 정체가 드러날 걸 소비자들이 걱정한다는 것이다. 그 사이로 먼지가 들어가야 얼마나 들어가겠는가? 또 상자 안의 물건은 몇 겹으로 포장되어 있는데 딱히 드러날 일도 없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돈이 문제다. 그깟 구멍하나 뚫는 데도 돈이 든다. 구멍을 뚫기 위한 목형을 만드는 데 10만~15만 원이 든다. 단지 구멍만 뚫는 게 아니라 구멍을 뚫는 만큼 약해진 내구성을 더 강화해야 한다. 택배 상자에 구멍 하나 뚫는 데 220원이 든다. 그 많은 택배 상자를 생각하면 적은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왠지 소비자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액수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지난 23일부터 우체국에서는 구멍 손잡이가 있는 택배 상자를 판매한다.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부디 모든 무거운 택배 상자에 구멍이 뚫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어떤 신문은 택배노동자들을 위해 장관이 나서서 기껏 한 일이 고작 구멍 손잡이 뚫는 것이냐는 기사를 실었다. 일머리 없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네가 한번 뚫어봐라!"

사람의 체온을 1도 높이는 데 필요한 에너지면 그 사람을 430m 들어 올릴 수 있다. 사람의 몸을 데우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체온을 1도 높이면 큰일 난다. 하지만 마음의 온도는 높여야 한다. 체온을 올리는 것보다 더 큰 에너지, 노력,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택배 상자 구멍 손잡이 만세!

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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