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민족주의' 목소리만 드높았던 G20 정상회의... 선봉은 트럼프

입력
2020.11.22 15:27
8면
트럼프 "미국인, 가장 먼저 백신 접종받기를"
푸틴·시진핑·존슨도 자국 백신 개발만 강조
백신 이기주의에 코로나 공동 대응 요원해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공동 대응을 위해 각국 정상이 의기투합한 주요 20개국(G20) 회의가 ‘백신 민족주의’만 부각시킨 이기주의 경연장으로 전락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제 몫 챙기기야 새삼스러울 법도 없지만 나머지 강대국 정상들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는 평가다. 빠른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종식의 필요 조건인 백신ㆍ치료제 ‘균등 공급’이란 대의가 자국 우선주의 앞에 설 자리를 잃은 모습이다.

21일(현지시간)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이날 G20 화상정상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시민들이 가장 먼저 코로나19 예방접종을 받기 바란다”고 말했다. 최근 자국 제약사들이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이 긍정적인 3상 임상시험 중간결과를 연이어 내놓자 보다 강하게 미국 지분을 강조한 것이다. 폴리티코는 “화이자 백신은 독일 바이오엔테크의 과학기술을 토대로 공동 개발된 것이지만, 트럼프는 미국의 성과만 강조했다”고 꼬집었다. 트럼프는 앞서 9월 유엔에서도 “자국민을 돌봐야 진정한 협력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코로나19 공동 대응을 사실상 거부했다.

그러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등도 앞다퉈 자국의 백신 개발ㆍ생산 상황을 설명하며 백신 민족주의를 부채질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스푸트니크V 백신을 다른 나라에 보급할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세계 최초로 승인한 코로나19 백신 스푸트니크V가 3상 임상에서 92% 예방 효과를 보였다고 주장한다. 서방국가들이 20명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시험 등을 이유로 백신 효능과 안전성에 의혹을 제기했지만 러시아 측은 백신의 국외 보급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물론 이날 회의에서 ‘공평한 백신 분배’를 강조한 정상들도 있다. 의장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은 “모든 사람이 공정하게 저렴한 코로나19 백신ㆍ치료제에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했고,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G20 회원국들이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코로나19 백신을 공동 구매하고 배분할 목적으로 186개국이 모여 만든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를 운영하려면 연말까지 45억달러(약 5조원)가 추가로 필요하다면서 각국의 기부를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선뜻 거금을 내놓을 국가는 마땅치 않아 보인다. 국제개발 전문가인 카트리 버트럼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주도하는 백신 공급 협의체 ‘ACT-A’에 서명한 G20 회원국들이 기본 원칙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G20 회원국 대부분이 협력은커녕 개별적으로 코로나19 백신ㆍ치료제 확보전에 뛰어 들면서 국제 공동 자금도 모이지 않고 연대가 더 어려워졌다는 지적이다.

진달래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