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소설집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에 대해 글을 써야한다면 '복화술사'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단편이 선사하는 점입가경의 감흥이 그만큼 예외적이었다. 가령 화자의 다음과 같은 진술들에 주목한다면 그러지 않기가 오히려 어렵다. “복화술은 배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를 둘러싼 세상의 공기를 몸 깊은 곳에 모아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 그런데 복화술사를 둘러싼 대기 전체에 음울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곳이라면? 글쎄요.”
여기서 말하는 ‘복화술사’가 소설가의 은유일 수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복화술을 가능하게 해주는 “세상의 공기”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은 듯하다. 이를테면 화자의 아버지가 펼친 1980년대 복화술 거리공연 장면이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 5월 항쟁의 비극이 휩쓸고 지나간 뒤의 어느 겨울, “광주의 충장로우체국 앞”에서였다. 화자의 아버지는 전래동화 ‘금도끼 은도끼’를 구연하다 산신령이 등장해 나무꾼을 만나는,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웃음이 터져야 할 대목”에서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린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 구경꾼과 행인들이 함께 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희극이 아니라 비극을 공연하는 복화술사라는 것이 가능할까요?”라고 화자는 짐짓 묻지만 희극과 비극을 구획하는 것은 복화술사(소설가)의 표현 자체가 아니라 어쩌면 “세상의 공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소설은 전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의 공기”가 울고 있었으니 “그 울음바다를 아무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복화술사 삼대(화자의 조부도 일제시대에 복화술사였다)가 정치나 권력이나 역사라고 불려온 것과 상관없는 듯 살아온 존재들이라고 해서 목소리를 갖지 못한 하위자니 소수자성이니 하는 개념부터 덥석 들이댈 일은 아니다. 남용하면 안 쓰느니만 못한 이 “현대적 클리셰”들을 진작 비껴난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복화술(腹話術)이 아니라 “겹 복 자를 써서 복화술(複話術)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라는 화자의 말마따나 그들은 목소리를 갖지 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개의 목소리를 지녔다.
“의도와 관계없이 튀어나오는 그것, 스스로 발생하고 스스로 움직이는 그것, 그 목소리”들이 질병의 징후나 기술연마의 산물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이며 “생명의 문제”라는 데 이르면 왜 이 소설집에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운, 그래서 ‘진실’을 대변하지 못하는 일인칭 화자들이 반복해 등장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공기”는 일인칭 ‘나’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여러 번 등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국 ‘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공기”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