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이 인간의 삶을 옥죄어 올 때마다 음악이 몰두했던 주제가 있습니다. 마치 유행이라도 타듯 어떤 주제적 경향을 띠게 되는 거죠. 불멸, 죽음, 유한한 시간, 장례식. 슬픔 등의 뼈아픈 성찰이 음표를 통해 번역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적 시선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요. 감염병의 장애 속에서도 음악은 창의성의 비옥한 토대를 발굴할 수 있을까요. 올해 5월, 독일 밤베르크에서 일어난 음악적 사건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밤베르크 심포니는 긴급한 전염병의 위기를 음악적으로 고찰하기 위해 ‘희망의 반성(REFLECTIONS OF HOPE)’이란 교향시를 창작합니다. 코로나로 뿔뿔이 흩어진 단원 86명이 스마트폰으로 각자의 연주 모습을 촬영하면, 이를 악단에서 다시 합성, 편집하는 방식으로 완성했는데. 밀집과 밀폐의 위험을 가진 콘서트홀 대신 ‘디지털 초연’이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됩니다. 오케스트라를 으레 이끌어야 할 지휘자가 이 연주에선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영상 제작에 동참한 비디오 아티스트와 오디오 프로듀서의 역할이 훨씬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그들은 이 작품의 의미를 ‘코로나 전염병에 대한 교향악적 답변’이라 일컫습니다. 감상자 허를 찌르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단원들이 돌연 악기를 내려놓고 20개가 넘는 각자의 모국어로 중얼거리거나 절규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합니다. 이때 그들이 내뱉는 단어는 “질병” “감금” “백신” “인공호흡기”처럼 2020년 특유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100년 뒤에도 코로나 시대를 기억하는 고전으로 살아남을지 모릅니다.
코로나가 아무리 맹위를 떨친다 해도,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했던 호흡기 질환은 여전히 스페인 독감입니다. 1918년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하며 불과 3년 만에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인 5억명을 감염시키고 5,000만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으니까요. 노년층의 건강을 맹렬히 위협하는 코로나에 비해, 스페인 독감은 20, 30대 청년의 사망률에 가장 치명적이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이미 망가진 세상을 한 번 더 초토화시킨 것이지요.
1918년 10월, 음악잡지 Musical Courier 1면에 실린 기사들은 100여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비슷한 동병상련을 느끼게 합니다. “시카고 오페라단의 순회 공연이 취소되고 인플루엔자로 많은 콘서트홀이 폐쇄되었다.” 잡지의 다른 귀퉁이에는 스페인 독감의 틈새를 공략하는 전략이 눈에 띕니다. “전염병에 걸릴 위험 없이 대규모 그랜드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다.” 에디슨 축음기의 홍보 문구입니다.
당시 브라질로 순회 공연을 떠났던 다리우스 미요는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고향인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맞닥뜨린 전염병의 공포를 그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관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짐수레가 던진 시체가 공동묘지에 쌓여갔다.” 2020년 외신이 전해온 브라질의 상황은 미요가 증언했던 100년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코로나로 사망자가 급증하는데 무덤은 턱없이 모자라니 굴착기까지 동원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전염병의 희생자를 위해 미요가 작곡했던 ‘목관 앙상블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치유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통상적이라면 화려한 피날레로 마무리했을 마지막 악장을 미요는 희생자를 기리는 장송 행진곡으로 마감합니다. 전염병이 인간의 삶을 옥죄어 올 때마다 음악이 몰두했던 주제들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불멸, 죽음, 유한한 시간, 장례식. 슬픔 등의 뼈아픈 성찰이 100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