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들고 뛰는데도 흔들림 없는 화면... '짐벌'이 부리는 '0'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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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3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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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결에 커피를 들고 이동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손이나 옷에 커피가 묻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커피를 흘리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커피잔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걸으면 된다. 아무리 빨리 걷더라도 커피가 출렁거리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손목의 방향을 바꿔 진동을 낮추는 능력이 사람에게 탑재돼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출렁거리거나, 뒤로 또는 오른쪽으로 치우친다 싶으면 반대편으로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커피를 쏟지 않고 안정적으로 운반할 수 있다.

‘짐벌(Gimbal)’은 이와 같은 사람의 수평 유지 능력을 기계로 구현한 장치다. 외부의 움직임에 대해 반대 방향으로 같은 힘을 가함으로써 움직임을 ‘0’으로 만드는 간단한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흔들리는 곳에서 특정 물체만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고 싶을 때 널리 사용된다.

과거 선박이나 망원경, 광학 장비 등에서 활용된 짐벌은 영화 촬영장 등에 쓰이다가 최근엔 드론, 스마트폰에까지 퍼지며 영상 촬영계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오랜 역사 자랑하는 짐벌... 잉크병부터 난로, 배와 비행기에서까지

짐벌을 처음 발명한 사람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기원전 3세기 후반 필로 메카니쿠스라는 그리스 공학자가 짐벌 장치를 처음으로 묘사했다. 잉크가 담긴 통을 여러 겹의 금속 고리 중앙에 매달아두고 통 주위를 구멍이 뚫린 팔면체로 감싼 형태였다. 이 장치를 이용하면 팔면체를 어느 쪽으로 돌리더라도 잉크를 흘리지 않고 편리하게 펜을 꽂아둘 수 있었다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도 짐벌 개념이 적용된 향로(2세기)나 문의 경첩(6세기)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7세기 말 당나라 고종의 황후이자 스스로 무주 황제에 올랐던 측천무후에게는 한 장인이 짐벌 개념을 이용해 흔들리지 않는 휴대용 난로를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오늘날 짐벌은 특성상 흔들리는 곳에서 많이 사용된다. 대표적인 곳이 바다 위를 항해하는 선박으로, 배 위에 설치되는 컵 홀더나 나침반, 난로 등은 파도가 어떤 방향으로 치더라도 크게 움직이지 않도록 짐벌 장치를 활용하기도 한다. 우주로 쏘아 올리는 로켓에도 적용된다. 로켓의 짐벌은 우주발사체의 몸통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단의 연소실만 움직여 비행 방향을 제어하는 용도로 쓰인다. 효율성 덕분에 현대 우주 로켓을 만들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술이다.

카메라 들고 달리며 찍어도 미끄러지듯 날아가는 화면

짐벌엔 기본적으로 여러 개의 ‘축’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는 3차원 세계에서 물체는 기본적으로 3개의 축을 기준으로 회전하는데, 각 회전을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위스 물리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1748년 언급한 ‘오일러 각’으로 알려진 이 세 가지 축은 ‘롤(Rollㆍ세로축)’, ‘ 피치(Pitchㆍ가로축)’, ‘요(Yawㆍ수직축)’으로 주로 불린다.

간단한 형태의 1축 짐벌은 롤 축만 보정한다. 즉 물체의 좌우 수평만 유지해주는 쓰임이다. 실질적으로는 2축 짐벌부터 사용하는데, 2축 짐벌은 롤 축과 피치 축을 보정함으로써 물체의 좌우 수평과 상하 수평을 잡아준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요 축, 즉 수직 흔들림까지 보정해주는 3축 짐벌이다. 상하좌우 위아래 어느 방향으로 진동이 가해지더라도 물체를 그 위치에 그대로 정지시켜놓을 수 있다.

3축 짐벌이 가장 널리 활용되는 분야는 촬영장이다. 1975년 ‘상처뿐인 영광’ 이라는 미국 영화를 촬영한 감독 가렛 브라운은 카메라를 특별한 장치로 몸에 고정해 뛰거나 계단을 오르내려도 매끄러운 화면을 얻을 수 있는 짐벌 장치를 고안했다. 카메라 아래에 무게 추를 달아 무게 중심을 낮춘 다음, 카메라와 손잡이 사이에 짐벌을 설치하는 식이었다. 관성이 적용되는 무게추는 가만히 있으려고 하고, 손잡이에 달린 짐벌은 사람 손의 미세한 움직임을 무력화시킨다. 그 결과 카메라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상태에서 장면을 담을 수 있다.

당시 이 기계식 짐벌 장치는 ‘스테디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현재까지도 영화나 드라마 등을 촬영하는 장소에서 촬영 감독의 몸에 매달린 다양한 종류의 스테디캠을 볼 수 있다. 대표적 장면으로는 존 아빌드센 감독의 1976년 영화 ‘록키’에서 길거리를 조깅하는 주인공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롱테이크 화면을 꼽을 수 있다.

센서만 있다면 휴대폰도 하나의 짐벌

2013년부터는 전자식 제어가 가능한 촬영용 짐벌이 시장에 쏟아지면서 접근성이 일반인들에게까지 넓어졌다. 전자식 짐벌 안에는 가속도 센서와 자이로 센서가 탑재돼 있어 회전 방향이나 기울어짐 등이 자동으로 측정되며 카메라의 흔들림이 보정된다. 중국의 드론 업체 DJI 등이 경쟁적으로 짐벌을 생산해내면서 이제 휴대폰용 짐벌은 과거보다 부담이 덜한 10만 원대에도 구매할 수 있게 됐다.

전자식 짐벌은 비행기 자동 조종 장치에서 유래한다. 비행기의 방향과 속도, 이동 거리의 변화를 감지하는 가속도 센서와 기체의 기울어짐 정도를 인식하는 자이로스코프가 분석한 운항 정보를 바탕으로 비행경로 및 고도를 자동으로 유지하도록 하는 원리다. 과거에는 일반적인 제품에 사용할 수 없었지만 2010년대 들어 가속도 센서와 같은 초소형 정밀 제어 센서 등의 가격이 빠르게 하락하면서 촬영용 짐벌의 시대가 열렸다.

최근 들어 스마트폰 자체에 짐벌 기능을 탑재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달 출시된 LG전자 ‘LG윙’은 내부에 짐벌 역할을 하는 센서가 6개나 장착돼 있어 휴대폰을 든 채로 뛰거나 계단을 오르내려도 흔들리지 않은 깨끗한 영상을 얻을 수 있다. 올해 6월 중국 비보에서 출시한 ‘X50 프로’에도 짐벌 기능이 내장돼 롤ㆍ피치 축 보정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곽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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