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스마트폰으로 달러, 유로, 위안화 쓴다? 속도내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입력
2020.10.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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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ㆍ국제기구들, CBDC 발행 논의 가속화

"디지털 형태로 발행된 중국 위안화를 스마트폰에 넣고 다니며 서울과 동남아 휴양지 상점에서 자유롭게 쓴다?"

거짓말 같은 얘기로 들릴 수 있지만, 어쩌면 조만간 실현될 현실일 지도 모른다. 비트코인, 리브라 처럼 주로 민간 영역에서 주도하던 디지털화폐 개발과 유통에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다투어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인민은행, 유럽중앙은행(ECB),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 등이 실험 중인 신개념 통화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로 불린다. CBDC의 본격 유통은 각국의 통화정책은 물론, 개인의 실생활에도 거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실제 지난주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국제결제은행(BIS) 등은 CBDC 발행으로 생길 변화와 예상 문제를 집중 논의했다.

인민은행, 연준, ECB 등 속속 가세

21일 외신과 금융권에 따르면, 중국 인민은행은 지난주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시에서 5만명에게 CBDC인 ‘디지털 위안’을 1인당 200위안씩 총 1,000만위안(약 17억원) 뿌려 실제 상거래에 사용하는 실험에 착수했다.

ECB도 이달 ‘디지털 유로에 관한 보고서’를 공개하고, 최소 1년 반 이후 디지털 유로 발행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발행 시점이 멀지는 않았다"는 게 언론의 전망이다.

그간 디지털 달러 발행에 회의적이던 연준도 최근 긍정적 발언이 부쩍 늘었다. 이미 보스턴 연방준비은행과 매사추세츠공대(MIT)가 협업해 디지털 화폐 테스트를 진행해 왔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CBDC는 아직 개발 초기 단계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발생할 변화는 상당하다. CBDC는 비트코인 등 기존 암호화폐나 페이스북이 계획을 밝힌 ‘리브라’ 같은 스테이블코인(법정화폐와 연계해 가치가 안정된 암호화폐) 등과 달리 중앙은행이 보증하기 때문에 안정성이 확보된다. 그러면서도 디지털 기술을 통해 지급 결제에 소요되는 비용은 크게 줄일 수 있다.

한국에서 달러ㆍ유로ㆍ위안이 경쟁한다?


거래비용 감소는 발행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다른 나라 중앙은행의 디지털화폐를 사용할 가능성을 열고 있다.

실제 ECB와 'e-크로나'를 개발 중인 스웨덴중앙은행은 스웨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소비자들이 CBDC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중국 인민은행이 디지털 위안 개발을 서두르는 것도, 달러 패권을 활용한 미국의 압박에 맞서 위안화의 국제 유통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게 중국 내외의 평가다.

이론적으로 보면 한국의 소비자들도 디지털로 발행된 달러화, 유로화, 위안화 등을 비교적 자유롭게 보유하고 거래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CBDC 보편화는 치러야 할 대가도 만만치 않다. 지난 19일 IMF가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CBDC는 금융 불안을 수반한다. 특히 통화 존재감이 약한 신흥국의 경우 소비자가 자국 통화보다 외국의 CBDC를 더 많이 사용할 경우, 통화정책의 독립성까지 잃을 수 있다.

이에 IMF는 해외에서 CBDC 유통을 허용할 지는 각국이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아구스틴 카르스텐스 BIS 사무총장은 “만약 주요국이 CBDC를 개발하고 타국 거주자가 이를 이용하기를 원한다면 그 나라 중앙은행의 승인을 받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가 내 계좌에 직접 돈을 쏜다면?


CBDC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와중에 경기부양 효과를 극대화할 대안으로도 거론되고 있다.

세계은행의 비아조 보손 수석고문 등은 CBDC 인프라를 통해 정부가 가정과 기업이 보유한 계좌에 돈을 직접 이체하는 가장 효율적인 경로가 될 수 있다고 관측했다. 소비 진작을 위해 풀었던 재난지원금이나 지역화폐 등이 CBDC의 형태로 더 효과적으로 전달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경제학자 프랜시스 코폴라는 “CBDC가 경기부양에 동원될 경우 중앙은행의 중립성이 훼손될 여지가 있다”며 CBDC 인프라를 이용하더라도 재정정책의 책임 소재는 정부로 명확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이후 한계에 다다른 통화정책의 여력도 좀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IMF 보고서는 이론적으로 CBDC를 통해 현금 보유에 마이너스 이자를 부과하는 방식 등으로 중앙은행이 정책금리의 실효하한선을 낮출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상당한 논란을 부를 것으로 예상된다. 헤지펀드 트레시스의 다니엘 라칼레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중앙은행들이 CBDC 개발로 진짜 원하는 것은 개인의 소비를 강요하고 통제하려는 것”이라며 “경기 회복의 수단은 오로지 혁신을 통한 성장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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