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새로운 여신(女神)이야기, '극락왕생'으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입력
2020.10.2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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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치러진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시상식에서 문체부장관상이 고사리박사의 웹툰 ‘극락왕생’에게 돌아갔을 때, 웹툰계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 받을 정도면 작품성 정도야 어느 정도 인정받은 셈. '극락왕생'에는 주목할 만한 포인트가 몇가지 더 있다. 우선 오픈 만화 플랫폼 '딜리헙'이 배출한 첫 수상작이었다. 거대 포털사의 기라성 같은 웹툰들을, 독립 플랫폼의 작품이 누른 것이다. 그러면서도 2018년 연재 10개월만에 매출 2억원을 돌파하면서 상업적 성공까지 거뒀다. 마지막으로 공짜, 혹은 회당 100원, 200원 하는 다른 웹툰들의 구독료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 작품의 구독료는 무려 회당 3,300원에 이르렀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작품 이외의 이유들까지 합쳐져 더 화제가 됐던 '극락왕생'이 최근 문학동네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단행본 출간을 계기로 지난 19일 경기 부천 작업실 인근 카페에서 작가 고사리박사를 만났다.



'극락왕생'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억울하게 죽은 이가 불보살의 자비로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를 다시 살게 되는 과정에서 겪는 일을 그렸다. 동양적 세계관에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철학적 사유, 완성도 높은 그림 덕에 ‘한국만화의 새로운 정통’이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작가도 '작품의 성공' 못지 않게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스스로 발견했다는 점에서 '극락왕생'에다 큰 의미를 뒀다. 그는 "‘극락왕생’을 그리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만화 시장에 내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대형 플랫폼에서 연재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쪽에선 플랫폼 입맛에 맞춘 상업적인 만화를 주문했고, 전 해낼 자신이 없었어요." 이대로 전업작가를 포기해야 하나 하던 찰나, 그 때 막 생겨난 '딜리헙'을 발견했다.

딜리헙은 오픈 만화 플랫폼을 표방했다. 누구라도 자유롭게 작품을 올릴 수 있었다. 작품 내용에 대한 간섭은 없었다. 심지어 독자들에게 받는 구독료도 작가 마음대로 책정하도록 했다. 딜리헙은 수입의 6% 정도만 수수료로 받았다. 플랫폼에다 에이전시까지 끼어들어 작품 내용과 방향에 관여하고 수익을 나눠가지는 대형 플랫폼이 불편하던 차였다. "전업작가를 그만둘까 하던 때였으니 '마지막으로 그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이 만화만 그려보고 말자'는 심정으로 시작한 작품"이 바로 ‘극락왕생’이었다.



불안하진 않았을까. "아니에요. 묘하게도 '내가 보고 싶어서 내가 직접 그리는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분명히 있을 거야'라는 확신만큼은 절대 흔들리지 않더라고요." 신출내기 작가 주제에 회당 구독료를 3,300원으로 설정한 대담함은 그 확신에서 나왔다. 3,300원으로 설정한 이유도 재밌다. "딜리헙은 만원 단위로 충전할 수 있거든요. '일단 한번 충전하면 세 편은 봐라, 그러면 계속 보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라고 생각했죠."

작가의 목표는 '완전히 새로운 여신 신화 쓰기'였다. “작품을 구상할 적에 여성주의를 공부하다 우연히 불교미술 이야기에 접하게 됐어요. 한국 불교는 민간 설화 같은 것들이 섞여들면서 인도나 일본 불교와 매우 다른 양상을 띠어요. 한국의 여신 신화를 다시 발견하기에 불교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극락왕생'이란 제목, 윤회란 설정에다 불보살들이 줄지어 등장하지만, 이 웹툰이 ‘종교 웹툰'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다. 주인공을 비롯, 신과 인간 모두가 여성인 웹툰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전 불교 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오래된 팬덤 문화 같은 거라 생각해요. 그 팬덤 문화에서 여성은 늘 누군가를 숭배하는 존재로만 그려져요.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만일 역사가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였다면?" "이 세상의 슬픔과 기쁨을 만든 게 여신이었다면?" "그래서 이 모든 걸 바꿀 수 있다면?" 이 대담한 질문이 만들어낸 새로운 여성 서사에 독자들이 움직였다. "회당 3,300원은, 솔직히 비싸죠. 하지만 그 가격에 어울리는 웹툰이라 자부합니다. 이번 기회에 웹툰계도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톤 앤 매너'가 다양해졌으면 해요."

여성주의 입장에서 여성 신화를 그려보고 싶었던 작가에게 '복학왕’, ‘헬퍼’ 등이 촉발한 웹툰과 표현의 자유 논란은 어떻게 보일까. 작가는 따끔한 일침을 놨다. “표현의 자유 문제는 왜 남성 작가들 작품에서만 논란이 되는지부터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성 작가들은 지금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한다 느끼지 않아요 그 차이를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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