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한 반찬이 없을 때 찬물에 만 밥 한술에 깨소금으로 양념한 새우젓 한 젓가락을 얹어 먹으면 꿀맛이 따로 없다. 또 젓갈을 넣지 않고 담근 김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젓갈은 식탁 위의 감초 같은 존재다.
2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맛깔젓’의 발효집산지인 충남 논산시 강경읍은 명실상부한 국내 젓갈 1번지다. 이곳 상인의 손을 거쳐 나가는 젓갈은 전국 유통량의 60%에 이른다.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강경역에 내린 뒤 읍내와 금강방향으로 10분 정도 걷다 보면 2차선 골목으로 이어진 염천동과 대흥동, 서창동에 들어선다. 분명히 육지 한가운데 임에도 비릿한 생선 냄새와 콤콤함이 섞인 묘한 냄새가 코끝을 스쳐 “근처에 바다가 있나”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골목 초입을 지나 도로 양쪽에 빼곡히 들어선 젓갈 가게들을 발견하면서 의구심은 풀린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젓갈집이다. 무려 150곳에 이른다.
바다가 있는 군산에서 37km나 떨어진 내륙 강경에 이처럼 많은 젓갈집이 성업인 이유는 금강 때문이다.
강경에는 군산으로 흘러가는 금강의 포구가 일찌감치 형성됐다. 조선시대 후기 서해를 누비던 어선들이 깊숙한 이곳까지 들어와 서해 수산물을 풀어 파시를 형성했다. 1평양, 2강경, 3대구라 부르는 전국 3대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성어기에는 하루 100여척의 배가 생선, 소금 등을 싣고 드나들었다. 서해의 해산물은 이곳 상인의 손을 거쳐 전국 각지로 공급됐다. 자연스럽게 거래하고 남은 수산물을 오래 보관하기 위한 염장법이 발달했고, 이 덕분에 강경은 국내 최대 젓갈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강경포구는 1970년대 호남고속도로 개통과 금강하굿둑 공사가 시작된 1980년대 포구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 그런데도 상인들의 노력으로 포구의 역사와 전통, 젓갈의 명성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포구가 제 기능을 하던 1960∼70년대까지 3만명에 이르던 인구는 현재 8,500여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젓갈집은 몇 배 늘었다. 점포 1곳당 평균 4명이 일하는 것을 감안하면 젓갈이 강경 경제의 버팀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0여 젓갈 집 가운데 원조는 66년을 이어 온 ‘심씨네 젓갈 신진상회’다. 심씨네 젓갈은 1954년 1대 주인 심희섭(87)씨가 지금의 자리에서 젓갈을 함께 취급하는 수산물 가게를 차리면서 시작됐다. 심씨는 개업 이후 한번도 가게를 옮기지 않고 대를 이어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경젓갈 시장의 개척자이자 산 증인이다.
강경젓갈의 전통은 200년이 넘지만, 소규모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를 전문화한 주인공이 심씨다. 심씨가 젓갈집 문을 연 뒤 다른 가게들이 하나둘씩 생기면서 젓갈 거리가 만들어졌다.
심씨는 6ㆍ25 이후 생계를 위해 18세의 나이에 생선 장수로 나섰다. 병환의 아버지와 손위 형의 군입대로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그는 포구의 도매상에게 생선을 조금씩 떼어다가 시장 한 켠에 좌판을 폈다.
장사 규모가 워낙 작아 하루 쌀 몇 되를 살 수 있는 수입이 전부였지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어 행복했다. 타고난 성실함과 장사 수완으로 많은 단골이 생기고 23세 땐 생선도매상으로 성장했다.
그는 “군 제대 후 다시 장사를 시작하고 도매상 규모가 커지면서 가까운 논산과 이리(지금의 익산) 연산의 많은 소매상을 단골로 만들었다”며 “좌판 장사 시절 소매상이 어떤 물건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기에 소매상의 마음을 헤아린 도매사업이 성공 비결이었다”고 말했다.
27세 무렵엔 선배 상인과 동업으로 객주로 나섰다. 강경포구의 최연소이자 마지막 객주가 된 그는 10년 뒤 동업자 지분을 모두 인수, 지금의 가게 터에 신진상회라는 간판을 걸었다. 자신의 가게를 마련한 그는 전국에 생선과 젓갈을 공급하는 객주 사업에 매달렸다.
1980년대 초 나이 쉰이 됐을 무렵 금강에 퇴적물이 쌓여 강경포구의 역할이 줄어들자 그는 새우젓 등 1년에 많게는 5,000드럼을 거래하는 젓갈 객주 사업에 전념했다. 좋은 새우젓을 담그기 위해 강화도와 목포, 제주도를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20년 넘게 신용으로 맺은 인맥은 가장 큰 자산이 됐다.
선주들이 공급한 최고의 재료는 맛 좋은 젓갈로 변신했다. 대전과 전주 익산의 부녀자들이 심씨의 젓갈을 받아 팔기 시작하면서 그의 젓갈은 전국으로 알려졌다.
그는 “처음 젓갈 상점을 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강경의 젓갈집은 3곳으로 늘었고, 부녀자들이 젓갈을 받아 주변 도시의 시장에 나가 팔면서 강경젓갈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며 “자식 교육을 위해 새벽 열차를 타고 억척스럽게 전국을 누빈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심씨네 젓갈이 있다”고 말했다.
엄청난 물량의 젓갈 보관을 위해 대전, 금산, 광천 등지의 폐광과 토굴을 확보했다. 젓갈은 12∼15℃에서 발효되어야 가장 좋은 맛을 내기 때문이다.
심씨는 “강경은 젓갈의 원료를 조달하는 항구가 아닌 집산지로, 발효 기술이 뛰어난 곳”이라며 “200년 전통으로 내려온 강경젓갈의 비결은 염장 기법과 발효 장소, 일정한 온도 유지에 있다"고 말했다.
1986년 큰아들 철호(59)씨가 합세하면서 2대 가업이 시작됐다. 아들이 다른 일을 하기 바랐던 그는 못마땅했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해온 직원들에게서 밑바닥 일부터 배우게 했다. 한 번도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아들이 일을 배운 지 5년째 되던 해 강화도 산지에서 새우 구입하는 일을 맡겼다. 하지만 아버지가 맡긴 첫 일은 실패였다. 현지 상인의 꼼수에 말려 품질이 떨어지는 새우를 사왔다. 가게의 큰 손해에 철호씨는 절치부심했다.
수년간 아버지로부터 수협 경매와 새우 선별법 등 기본적인 일을 새롭게 배운 그는 아버지에 버금가는 젓갈 상인으로 성장했다.
철호씨는 “신안 낙월도와 비금도, 강화도 등 전국 20여개의 섬에서 나오는 새우를 판별하는 안목을 키우면서 안정된 재료 구입을 할 수 있었다”며 “원재료가 젓갈의 맛을 결정하기 때문에 1년 젓갈 장사는 재료구입 과정에서 판가름 난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은 철호씨는 저장고로 사용하던 폐광과 폐철도 터널, 토굴에서 과감히 벗어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저온저장고 시설에 투자했다.
"폐광과 터널은 발효의 생명인 일정한 온도 유지가 어렵고 매장과 거리가 멀어 어려움이 많았다”는 게 새로운 투자의 이유였지만, “소비자의 입맛이 변해 17%에 이르던 양념 젓갈의 염도를 7%대로 낮추기 위해서는 저온저장고가 필수"였다.
그는 공장 김치가 쏟아져 나오고 김장하는 가정이 줄자 소비자에게 젓갈의 우수성을 직접 알리고 젓갈시장 활성화를 위해 상인 30여명과 손을 잡았다. 자비를 털어 '강경젓갈 축제'를 기획했다. 이후 강경젓갈 축제는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성장했고, 올해 23회를 맞았다. 강경젓갈협동조합도 그가 설립해 초대 이사장을 맡는 등 강경젓갈 시장을 반석에 올려놓았다.
그는 “강경맛깔젓축제로 강경젓갈의 이름이 전국으로 퍼져 지금은 강경하면 젓갈이 떠오를 정도로 명품이 됐다”며 “전통 제조법을 고수하고 위생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강경 젓갈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젓갈시장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연간 30톤 규모의 멸치액젓 생산시설도 갖췄다. 2대가 이어온 전통과 젓갈의 현대화를 위한 열정을 인정받아 2000년 충남도로부터 '전통문화의 집' 인증을 받았다. 올해는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 지정도 받았다.
그는 요즘 아들 원보(29)씨가 자신의 뒤를 이어 3대 가업을 이어가줬으면 하는 바람이 커졌다. 호주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하고 취업까지 확정됐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호텔이 문을 닫아 연초 일시 귀국한 아들이 젓갈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저온저장고를 도입하고 액젓을 생산하는 등 새로운 젓갈시장을 개척해 젓갈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던 것처럼 아들은 온라인 등 새로운 시장 접근 방법에 관심을 보였다. 원보씨는 "젓갈에 관심은 많지만 아직 가업을 잇겠다고 밝힐 단계는 아니다"면서도 "상황 변화에 따라 진로가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심씨네 젓갈 신진상회에 백년가게의 꿈이 영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