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공항에 부르고 기자회견 세우고… '귀순의 정치학'

입력
2020.10.07 19:00


조성길 전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대리가 한국에 정착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경위를 두고 뒷말이 나오고 있다. 딸을 북한에 두고 있어 한국행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은 조 전 대사대리의 의사와 달리, 15개월간 꽁꽁 숨겨졌던 비밀 입국이 갑작스럽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야당에선 정보당국이 실종 공무원 피격 사건 국면에 물 타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나온다. 실제 과거 정부가 정치에 개입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탈북자의 귀순을 활용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 환경따라 귀순을 북풍 소재로 활용

2016년 4월, 박근혜 정부는 4·13 총선을 닷새 앞두고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13명의 집단 탈북 사실을 공개했다. 당시 통일부는 기자회견을 열어 "최근 대북제재가 심화되면서 북한 체제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보고 희망이 있는 서울로 탈출했다"며 "이들의 탈북이 북한 내부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다"고 소개했다. 통상 신변문제 등으로 탈북자 관련 내용을 공표하지 않는 관례를 깬 것이어서 '선거용 북풍'을 노린 기획 탈북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 결과 "통일부의 집단 탈북 발표는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1994년 4월에는 김영삼 정부가 서울 김포공항 입국장에 100여명의 기자들을 모아 놓고 북한 사회안전부(경찰청) 대위 출신인 여만철씨 가족의 망명을 대대적으로 공개했다. 이 역시 탈북민의 입국 현장을 공개하지 않는 관례를 깼는데, 이마저도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극적 연출'을 위해서 입국 경로를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초 해군 함정을 통해 한국에 도착했던 여씨 가족은 해외로 다시 출국했다가 김포공항으로 재입국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이 나오던 시기여서 이를 덮기 위해 탈북민 입국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고위급 탈북민이 남한에 정착하면 정부가 이들을 북한 체제 비판의 선봉에 세운 예도 적지 않다. 북한 최고위급 탈북민이자 주체사상 이론가인 고(故) 황장엽 전 노동당 국제비서가 대표적이다. 황 전 비서는 1997년 김영삼 정부 시절 한국에 온 후 북한의 주체사상이 봉건사상으로 변질된 과정과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에 앞장서왔다.


진보 정권 때는 '귀순' 침묵

반면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을 추진했던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때는 정부가 공개적으로 탈북자 귀순을 발표한 적은 없다. 북한과의 대화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북측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오히려 일부 탈북자들이 자진해서 한국 입국 사실을 알리는가 하면 남측 정부와 마찰을 빚는 탈북자도 없지 않았다. 황장엽 전 비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악화시켰다면서 정부와 각을 세웠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서 고위급 인사의 귀순이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공개된 게 의외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야권 일각에서 정부가 물타기용으로 정보를 흘린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오자 정보 당국은 국회 보고에서 자신들이 정보를 유출한 것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통일부 고위 관계자는 "정보당국은 탈북민의 신변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둬야 한다"며 "불필요한 정보가 너무 많이 흘러나오니 정치 개입 공방이 생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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