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속 얼굴이 보고싶다

입력
2020.09.2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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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상황 중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왔다. 외출하기 참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하늘도 청명하다. 집 앞 놀이터에는 마스크를 쓴 아이들이 여럿 놀고 있는 게 보인다. 날씨가 좋아 어린이집에서 단체로 나온 듯하다. 마스크를 쓰고 노는 게 답답할 법도 한데 아이들은 이미 적응을 했는지 그저 신나게 논다. 괜시리 짠하다.

코로나 때문에 아쉬운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야속하게도 마스크는 얼굴의 반 이상을 가려버린다. 표정은 또 하나의 언어다. 언어가 일부 제한된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특히나 아이들의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게 가장 아쉽다. 어린 아이들의 귀여운 얼굴을 보고 싶은 내 이기적인 마음이겠으나, 천진하고 생생한 표정은 내 경직된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는데 특효약이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다. 진실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맑아지는 것 같다.

나 또한 어렸을 때는 순수한 표정을 마음껏 뽐내며 놀았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표정을 잃어버린다.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감정을 숨기는 데에 익숙해져 간다. 그리고 그 자리는 만들어진 가면이 대신한다.

그런 어른들을 생각하니 동화책 속 강아지가 떠오른다. '봄날의 개'라는 동화책에는 마음을 잘 숨기는 강아지가 등장한다. 낮에는 재롱도 부리고 꼬리도 흔들며 밝은 모습만 보여 주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다. 하지만 밤이 되어 혼자 있을 땐 낑낑거리며 운다. 단단히 매여 있는 목줄이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살고 있지만 실은 목줄을 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가여운 존재다. 사람들은 밝은 모습의 그 개를 '봄날의 개'라고 부른다.



봄날의 개가 우리 모습 같아 보이는 건 왜일까. 타인의 시선에만 갇혀 ‘보여 주기 위한’ 혹은 ‘미움받지 않을’ 감정만을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해외를 나가보면 한국인이 유독 표정이 다양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뭐든 절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우리 문화가 한몫한다. 진실한 감정은 타인과 공유되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이다가 봄날의 개처럼 밤마다 낑낑댈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감정을 억압하는 표현들이 익숙하다. ‘울지마 뚝그쳐’ 또는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같은 말들이다. 그런 말들을 듣고 자라면서 자신의 몇몇 감정에는 ‘나쁜 감정’이라는 라벨을 붙이게 되고 자연스레 억압하게 된다. 하지만 그 감정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화병이 그렇고, 불안으로 인해 목, 어깨 등이 뭉치는 것이나, 슬픔이 쌓이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져 버리는 현상이 그렇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모든 감정을 수용하고 건강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위기를 건너가는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깊은 대화를 나누고 진솔한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타인과 연결되는 것도 중요하다. 자신의 모든 감정을 소외시키지 않고, 진실한 관계 속에서 공감받을 수 있다면 스트레스 상황을 유연하게 건너갈 수 있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저 아이들이 자기만의 감정, 그러니까 생생한 표정을 잃지 않고 자라나기를 바란다. 자신을 억압하지 않아도 되는 진솔한 관계로 연결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마스크를 벗고 다닐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찾아오기를.



김혜령 작가ㆍ상담심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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