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의 시신 훼손 ‘강력 규탄→ 추정’… 한 발 빼는 정부

입력
2020.09.2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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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공무원 피격 사건’과 관련해 “공무원 A씨 시신을 불태운 북한의 만행을 규탄한다”던 정부 기조가 “북한의 시신 훼손이 추정된다”는 쪽으로 돌연 바뀌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5일 통일전선부 명의 통지문에서 “대단히 미안하다”고 사과한 이후부터다. 김 위원장의 사과를 계기로 남북 관계를 개선하려는 정부가 의도적으로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군 당국은 24일 이번 사건 첫 발표 때 '북한이 기름을 부어 해상에서 시신을 불태웠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25일 통지문에서 '총격으로 시신이 사라져 A씨가 의지하고 있던 부유물만 태웠다'고 반박했다. ‘시신 훼손 여부’는 북한의 국제협약 위반과 잔혹성을 규명할 핵심 쟁점이기도 하다.



군 입장문, 北 사과 이후 ‘공개 부정’ 당해

북한의 시신 훼손을 ‘확인’했다는 정부 기조가 ‘추정’으로 바뀐 기점은 25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간담회다. 국회 정보위 관계자는 28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국가정보원은 25일 보고 당시 북한의 시신 훼손이 ‘추정된다’는 표현을 썼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여러 자료를 봐도 명확하지가 않아 ‘추정된다’는 표현을 쓴 것으로, 우리 군 발표가 맞는지, 북한 입장이 맞는지 좀 더 확인을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25일 간담회는 군 당국의 발표를 뒤집는 북한의 통지문이 공개된 직후에 열렸다.

국회 국방위 간사인 황희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28일 합동참모본부 보고를 받은 뒤 “북측 주장대로 부유물만 태운 건지, 우리 측 첩보망 분석처럼 시신까지 태운 것인지에 대해선 남북 양측 간 협력적 조사가 더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군 당국의 발표를 여당 의원이 나흘 만에 공개 부정한 셈이다. 국방부는 24일 공식 입장문에서 “북한이 우리 국민에 대해 총격을 가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음을 확인했다. 상부 지시를 받은 북한의 의도된 만행이었다"고 한 바 있다.

24일 군의 발표는 군과 정보 당국, 미국 정보자산 등 복수 채널로 수집한 첩보를 종합 분석한 결과로, 정확도가 100%라고 볼 순 없다. 그러나 당시 발표는 문재인 대통령의 최종 승인을 받아 이뤄진 것이었다. 24일 오전 군의 분석 결과를 보고 받은 문 대통령은 '신빙성이 높다'는 판단에 따라 대국민 발표를 지시했다.


“부유물만 태웠다”는 北 발표에 뒤늦게 수색 확대

김 위원장 사과 이후, 정부는 스스로의 발표를 ‘자기 부정’하는 모양새가 됐다. 정부 소식통은 “감시 장비에 ‘40분 간 불빛이 보였다’는 것을 토대로 군 당국이 시신을 태웠다고 정리한 것으로 안다”며 “부유물이라면 40분간 탈 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군 당국이 ‘40분간 보인 불빛’ 만으로 ‘북한이 시신에 기름을 붓고 태웠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의미다. 정부는 ‘시신 훼손 정황이 담긴 사진을 당국이 확보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서도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선 감청 정보에 기인해 구체적 물증을 내놓지 못하는 군의 상황을 정치권이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신이 아닌 부유물만 태웠다'는 북한 입장 발표 이후 군이 A씨 유해를 보다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한 점도 석연치 않다. 군은 지난 21일 A씨 실종 당시 함정 20척과 항공기 2대를 투입했다. 27일에는 해군 함정 16척과 해양경찰청 함정 13척 등 총 36척을 '대대적으로' 동원했다. 살아 있는 A씨보다 A씨의 시신을 더 열심히 찾는 셈이다. 해양수산부는 28일 “A씨 수색에 서해5도 인근 해상에서 조업 중인 민간 어선 130척도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승임 기자
조소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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