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군부독재의 상징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인권기념관’이 되었다. 고문실이 있었던 5층에는 박종철 방과 김근태 방이 만들어졌다. 국가폭력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해서 절대로 잊지 말자는, 그리하여 반복하지 말자는 엄숙한 다짐이 건물에 새겨졌다.
하지만 박종철과 김근태, 두 개의 이름으로 충분할까? 영화 '1987'에서처럼 여성들의 목소리는 이 공간에서조차 지워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을 품고 최근 그곳에 다녀왔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 여성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전시회는 국가보안법(국보법) 피해자들의 구술로 구성되어 있었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처음에는 제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전시와 연계해서 출간된 동명의 단행본을 읽고서야 그 의미가 다가왔다.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금언을 소개한다. “‘말씀’의 세계에서 내쫓기는 것도 비참하지만, 그것에 감금당하는 것은 더욱 비참한 일이다.”
‘말씀’이란 사회를 지배하는 법과 제도, 규범을 담은 언어일 터다.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여성은 그 언어가 가르치는 바를 내면화할 뿐, 그 언어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승자와 지배자의 기억인 역사가 여성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건 이 때문이다. 비참한 일이다. 이런 세계에선 나의 시간과 이름이, 그리하여 “내가 누구인지”가 끊임없이 삭제된다. 하지만 더 참담한 건 그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나를 증명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프로젝트야말로 국보법의 폭력사를 ‘제대로’ 기록하려는 시도란 생각이 들었다.
“왜 여성인가?”를 질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프로젝트를 준비한 이들은 도리어 “왜 안 되는가?”라고 반문한다. 여성들은 남영동에도, 감옥에도, 87년 광장에도, 96년 연세대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끌려간 가족의 뒷바라지를 하며 일상을 지속시킨 것 역시 여성들이었다. 그 곡절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이 작업은 기존의 역사에 여성의 이야기를 그저 끼워 넣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오드리 로드는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했다. 사회변혁 운동은 폭압적인 국가의 도구, 즉 가부장제에 근간한 ‘정상 국가 이데올로기’를 답습했다. 다만 무엇을 ‘정상’으로 규정하는가가 달랐을 뿐이다.
생활 세계와 운동 세계, 생산과 재생산의 세계를 횡단하며 존재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국보법 아래에서 이 둘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를 가둔 ‘말의 감옥’을 터트려 지배 논리를 드러내고 새로운 말을 조직하려는 시도다. 물론 그 새로운 언어란 늘 ‘아직 오고 있는 중’일 테지만.
우리는 여전히 국보법이라는 ‘말씀’이 지배하는 세계를 산다. 국가가 내란 사건을 조작하고, 국민이 만든 합법적인 정당인 통합진보당을 강제로 해산시킨 것이 불과 6년 전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에 대해 입을 닫았다. 그게 다가 아니다. 국보법의 피해자였고, 그와 싸운 역사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은 586 남성들은 국보법을 그대로 둔 채로 권세를 누리고 있다. 그렇게 국보법이 구성한 정치의 장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586의 승리는 비참하다. “말씀의 세계에 갇혀”있으므로.
이제 나는 이 글을 시작했던 한 문장을 고쳐 써야 하겠다. “전시회는 국보법 피해자들의 구술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문장은 틀렸다. “전시회는 국보법과 국가 폭력의 숨겨진 이야기를 밝히고 그에 저항하기로 결심한 자들의 구술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역사는 기어코 말하려는 자들과 그 말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바꾼다.” 이 문장이 맞을지 여부는 우리에게 달렸다.
아쉽지만 코로나로 전시회 관람이 여의치 않다. VR 전시회와 책으로 함께 해보셔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