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평화로웠으나,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입력
2020.09.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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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통일 이후 동서독의 불균형

편집자주

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6ㆍ15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분단의 비극은 북핵 위험으로 더 증폭된 듯 하다. 이동기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가 독일 경험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글을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서 연재한다.



독일통일은 ’흡수‘통일이었다. 물론, 독일통일은 서독이 동독을 강제 ‘병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동독 주민의 지지를 받은 대표자들이 서독 정치가들과 정치 협상을 통해 ‘통일’이 이루어졌다. 동독이 서독의 정치와 행정 제도에 맞추어 서독에 ‘가입’했다. 폭력이나 물리적 충돌, 사회 혼란이나 주민 이탈이 없었다는 점에서 ‘평화통일’이기도 했다. 역사적 의의가 크다.

하지만 한 사건에 대한 역사 평가나 규정은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차원을 넘어야 한다. 외면상 합법적이었거나 주민의 동의가 일시적으로 존재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사건의 성격을 곧장 평가할 수는 없다. 사건은 과정과 영향을 낳고 그 속에서 사건의 의미는 더 복합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형식적으로는 동등한 자격을 갖고 자유로운 의사를 발현해 이루어진 협상의 결과도 실질적으로는 심각한 불균형과 불평등, 차이와 균열을 낳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독일통일도 그랬다.

1990년 3월 18일 자유선거를 통해 구성된 동독 정부와 서독 정부는 1990년 5월 18일 '통화 경제 사회 통합에 관한 동서독 조약'을 체결해 경제와 화폐 등의 문제에 대해 합의했다. 그 결과로 전문가들의 우려와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0년 7월 1일 동서독의 1대1 화폐통합이 이루어졌다.

동독인들은 서독의 화폐로 일시적으로나마 소비 욕구를 충족시켰다. 동독은 준비도 부족한 채 서독의 정치 체제와 행정 제도의 이식을 받아들여야 했다. 1990년 8월 31일 동서독 정부는 협상 8주 만에 ’통일조약‘을 체결했다. 서독 기본법 23조에 의거해 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가입’하는 절차를 통해 동서독이 통일하기로 결정되었다.

9조 6항의 1,000페이지 분량의 통일조약은 동독의 독일연방공화국 가입 규정과 기본법 개정, 동독 지역의 행정 조직 개편 등을 담았다. 서독 행정제도에 맞게 동독의 14개 군은 5개 주로 재편되었고, 신탁청을 통한 동독 자산의 대규모 사유화로 대부분의 동독 국영 기업과 공장들은 서독 자본에 귀속되었다. 그 외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서독 기준과 요구에 따라 동독 사회는 전면 개편되었다.

화폐통합과 체제이식은 동독 경제를 부흥시키거나 생활수준을 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동독 지역은 경제가 침체되고 실업이 증대했다. 사회 긴장과 불만이 증대했다. 1990년 10월 3일 통일선언 이후 오히려 동서독 지역의 차이와 균열은 ‘통일위기’라고 불릴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되었고 쉽사리 해결되지 못했다. 동독 지역 주민들은 박탈감과 실질적 격차를 경험하며 급속한 통일의 후유증에 대한 대가를 한 세대에 걸쳐 계속 치러야 했다. 동독 주민들은 구 동독 시절에 대한 향수인 오스탈기(Ostalgie)를 공유했고 통일 후 오히려 동독에 대한 집단정체성을 만들었다.



그런 대응을 통일 후 ‘후유증’이란 말로 표현하는 것은 상황을 안일하게 다루는 어법이다. 흔히 통일 후 동서독 사회가 평화롭게 잘 ‘통합’되었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동독과 서독 사회와 주민이 유사한 정도의 ‘통일 충격’과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사실과 다르다.

독일통일은 동서독 사회에 비대칭적이고 불균형한 변화를 낳았다. 통일 후 서독 사회와 주민이 겪은 변화는 약했다. 대부분의 서독 지역 주민들은 통일 자체에 곧 무심했고 동독 주민들의 고통이나 열패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독인들은 원래 살던 대로 살면서 가끔 동독 지역에 출장가거나 여행하면 되었다. 통일로 인해 서독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구조의 변화나 일상의 충격은 거의 없었다. 서독인들은 동독 지역의 낙후성을 직접 보고 동독 주민들과 거리를 두는 삶을 유지했다. 제 삶이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타 삶의 충격을 온전히 느끼기란 쉽지 않다.

반면 통일 후 동독 사회는 ‘이행사회’였다. 동독의 정치 제도와 경제 체제만이 아니라 40년 동안 학습하고 공유하던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무너졌고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배워야 했다. 20대와 30대 주민도 쉽지 않았지만 40대 이상의 장년층은 그 학습 과정을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동독인들은 서독 체제에 기초한 ‘통일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는데 하중은 너무 무거웠고 혼란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행’은 동독 주민들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변화의 속도는 빨랐고 변화의 심도는 가팔랐고, 변화의 차원은 전방위적이었다. 동독 주민들은 한편으로 그 변화에 조응하고 그것을 수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독 주민들이 도저히 감내할 수 없거나 거부할 수밖에 없는 변화도 상당했다.



1990년대 전반기 동독 주민들이 겪은 사회변화와 일상문화의 충격에 대한 연구가 현재 한창 진행 중이다. 5년 전 베를린 소재 독일역사박물관에서는 독일통일 25주년을 기념하며 처음으로 이 주제를 세상에 끌어 올렸다. 그 때 독일역사박물관과 협력해 그 기획전시를 마련한 포츠담 현대사 연구소는 통일 후 동독을 ‘이행사회’로 규정하며 몇 개의 핵심 주제를 소개했다.

첫째, 언어 변화다. 서독인들과는 달리 동독인들은 언어 세계에서 심각한 변화를 경험했다. 동독의 공식 용어 뿐 아니라 일상 언어의 많은 부분이 사라졌다. 또 통일 과정에서 새로운 용어와 개념이 등장했고 동독인들은 그것을 습득해야 했다. 서독 용어와 표현이 동독 사회에 유입되어 동독 언어와 경쟁했다. 서독 언어가 이기는 경우도 있고 동독 언어가 이기는 경우도 있고 두 언어가 공존하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서독인들과는 달리 동독인들만이 그런 언어 세계의 변화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언론 매체 환경의 변화였다. 동독 지역에서는 통일 후 새로운 신문과 잡지 발간과 방송 창립의 붐이 일었다. 동독인들은 다원주의 여론 사회와 다양한 정보의 홍수를 처음으로 경험했다. 서독인들에게는 이미 익숙하고 당연했지만 공산주의 기관지만 접하던 동독인들에게는 가장 신선한 자유의 경험이었다. 한편, 서독 신문과 방송은 동독인들의 삶의 위기와 차별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서독 언론의 오만하고 일방적인 태도는 동독인들에게 주류 언론에 대항할 ‘동독 언론’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지금도 여전히 동독에서는 주로 ‘동독 신문’이 읽힌다.



셋째, 서독마르크 유입으로 인한 소비 열풍과 소유권 인식이었다. 동독 주민들은 통일 후 신형 슈퍼마켓에서 비치된 온갖 상품들의 풍요에 놀랐다. 서독 자본주의 물질적 풍요는 백화점의 고가 물품만이 아니라 작은 슈퍼마켓에서도 확인이 되었다. 잠시의 소비 열풍 후 동독 주민들의 상당수는 그 풍요를 충분히 누릴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것은 통일 후 동독에서는 열쇠와 잠금 기구 및 진입 금지 장치 생산의 붐이 일었다는 사실이다. 소유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또 동독에 재산을 남기고 서독으로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소유권을 청구하는 것에 대한 공포도 크게 일었다. 서독인들이 부동산 소유권을 제기하는 경우에 맞서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는 거대한 시민운동이 동독에서 일었다. 그들에게 통일은 재산 강탈의 위험이었을 뿐이다.

넷째, 동독 지역은 노동세계가 급변했다. 동독 지역은 급격한 탈산업화로 실업의 위기가 만연했다. 처음으로 겪는 경쟁과 생존투쟁도 힘들었지만 서독 경영인들과 관리인들이 주도한 노동규율의 변화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동독인들 중 일부 주민들은 동독 공산주의 독재의 추악한 과거사와 직면해야 했다. 동독의 정보기관이었던 슈타지는 정직원도 9만 명에 달했지만 직원은 아니었지만 이웃이나 직장 동료 심지어 가족을 관찰해서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며 동독 감시 체제를 도운 이들은 18만 명에 달했다.

슈타지의 감시 체제가 적나라하게 밝혀지면서 친교 관계의 근간인 믿음과 신뢰, 의존과 유대가 산산 조각났다. 감시 당사자와 피해자들의 충격이 컸지만 가해자들의 가족과 친구들도 믿었던 가족과 동료가 자신들의 생각과 삶을 밀고한 사실에 직면해 난감했으며 회복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통일 후 동독의 ‘이행사회’가 겪은 변화와 충격, 유산과 대응들은 서독 사회에서는 낯설다. 이런 불균등과 인식의 차이가 통일 후 동서독의 통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통일은 인습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삶의 변화와 도전을 낳았다. 서독 사회와 주민들은 그 자체로 큰 변화를 겪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충격과 혼란을 겪는 주민들을 이웃으로 맞이했다. 다만 서독인들 다수가 그것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이동기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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