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쏘기 실력이 형편없는 신하에게 벌주를 내린 영조

입력
2020.08.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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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왕의 활쏘기

편집자주

여러분처럼 조선의 왕이나 왕비도 각자 취향이 있었고 거기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로 토요일에 소개합니다.



1409년 태종(太宗ㆍ재위 1400~1418)은 세자에게 활쏘기를 익히도록 명하였는데 이를 두고 여러 신하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활쏘기로 인해 학문을 소홀히 할까 염려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대해 태종은 “임금이 굳세고 용감하면 능히 아랫사람을 제압할 수 있고 활쏘기와 말타기는 굳세고 용감한 기질을 키우는 것”이라고 하며 활쏘기 수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태종이 강인한 국왕으로 키우고자 했던 이 세자는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ㆍ1394~1462)이었다.

세자에게 활쏘기 ‘조기 교육’을 명했던 태종의 모습에는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했던 무인 집안의 기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세자의 할아버지인 태조(太祖ㆍ재위 1392~1398) 이성계(李成桂)는 고려 공민왕(恭愍王ㆍ재위 1351~1374)으로부터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 한 사람뿐”이라고 인정받을 만큼 활쏘기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활쏘기만 놓고 보면 조선 최고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해야 할 것인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양녕대군은 여러 불미스러운 일 끝에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그의 활쏘기 실력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전통사회에서 총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활은 전장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무기였다. 오늘날 우리가 양궁이라는 이름의 스포츠로 접하는 활쏘기와는 그 무게감이 달랐을 것이다. 태종이 강조했던 것처럼 활쏘기는 왕이 스스로 심신을 단련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으며 군 통수권자의 위치에서 유사시를 대비해 군비를 갖춘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왕이 직접 활을 쏘는 일 못지않게 활쏘기를 지켜보는 일도 적지 않았다. 1425년 세종(世宗ㆍ재위 1418~1450)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군사들이 말을 타고 활 쏘는 것을 참관했다. 이 자리에서 성적이 좋은 이들에게는 상으로 활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른바 ‘관사(觀射)’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활쏘기 참관은 기본적으로 무예(武藝)를 권장하는 성격이 있었다. 그러나 왕이 참관하는 활쏘기에 무관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은 종친과 여러 신하들을 모아 활을 쏘게 해 보고 싶은데 이에 대해 밖에서 희학(戱謔)한다는 말들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하며 주위에 의견을 물었다. 이에 지신사(知申事ㆍ도승지) 곽존중은 “활쏘는 것은 육예(六藝)의 하나이요, 또 활을 쏘아 그 덕을 보는 것은 옛 제도입니다. 희학과는 다릅니다”라고 답했다.

육예는 고대 중국에서부터 가르쳐왔던 여섯 가지 기예로 예법, 음악, 활쏘기, 말타기, 서예, 수학을 지칭하는 것이다. 활쏘기가 육예의 하나이고, 그것을 통해 사람의 덕을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은 왕이 활쏘기를 참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명분이 됐다.

그러나 세종이 염려했던 것처럼 왕의 활쏘기 참관이 ‘놀이’로 비쳐질 여지도 적지 않았다. 1450년 문종(文宗ㆍ재위 1450~1452)이 활쏘기를 참관하자 신하들은 군사적 준비를 잊지 않는 뜻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상중(喪中)에 활터에 나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에 문종은 “놀이를 한 것이 아니고 부득이해서 한 것”이라고 변명처럼 들리는 대답을 내놓는다.

활쏘기 참관으로 인해 성종(成宗ㆍ재위 1469~1494)과 신하들 사이에 만들어진 긴장 관계를 살펴보면 그 성격이 더 구체적으로 보인다. 성종은 매월 무신(武臣)들의 활쏘기를 보겠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문신(文臣)은 경연(經筵)을 통해 자주 보지만, 무신들은 그렇지 않으니 활 쏘는 것을 보면서 접견하겠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경연을 중지하고 활쏘기 구경을 했던 일로 간언(諫言)을 듣기도 했다. 간언의 요지는 활쏘기 구경은 유희일 뿐인데 어찌 학문하는 일을 중지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성종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지만,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이 종친들을 거느리고 활쏘기를 참관하는 일이 잦아지자 종친들이 활쏘기 때문에 학문을 게을리 하게 된다거나 왕과의 친근함에 길들여져 예의를 벗어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등의 고언이 쏟아졌다.



이처럼 활쏘기가 갖는 성격이 양면적이기는 하지만 왕과 신하, 일반 사대부를 막론하고 덕행을 쌓는 일종의 의례라는 생각이 기저에 자리 잡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성격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대사례(大射禮)다. 대사례는 왕과 신하가 함께 활쏘기를 하는 의례다. 보통은 성균관에서 공자 사당(문묘)에 제사를 지내고 과거 시험 등과 함께 거행됐다. 조선시대에 대사례는 1477, 1502, 1505, 1534, 1743, 1764년 총 여섯 차례 시행됐다. 이 중 가장 극적인 것은 1743년의 대사례로 옛 제도를 본받고자 하는 영조(英祖ㆍ재위 1724~1776)의 뜻에 따라 꼭 200년 만에 다시 의례가 치러지게 됐다.

1743년의 대사례 때는 먼저 성균관에서 공자 사당에 제사를 지낸 뒤 명륜당에서 문과(文科) 과거를 시행했다. 그 다음에 하연대(下輦臺)에 마련한 활터에서 대사례를 거행했다. 그 후 무과(武科) 활쏘기 시험을 치러 인재를 선발했다. 의례의 전 과정은 ‘대사례의궤’로 기록됐고, 대사례 장면은 별도의 그림으로 그려져 전해지고 있다.




대사례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총 세 개의 장면이 연이어 그려져 있고 그 뒤에 행사에 참석한 신료 명단이 이어진다. 세 개의 장면은 왕이 활을 쏘는 장면, 신하들이 둘씩 짝을 지어 활을 쏘는 장면, 활쏘기가 끝난 후 성적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장면이다. 그림에 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전통에 따라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활 쏘는 장면임을 알 수 있는 것은 과녁이 다르기 때문이다. 왕은 곰이 그려진 과녁(웅후)을 사용했고, 신하들은 사슴이 그려진 과녁(미후)을 사용했다. 또한 왕이 앉는 의자 앞쪽으로는 용이 그려진 자리가 있는데 왕에게 활과 화살을 전달하는 신하가 그려져 있어서 이곳이 바로 왕이 활을 쏘는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신하들은 그보다 한단 낮은 곳에서 둘씩 짝을 지어 활을 쏘았다. 활을 쏘는 사대 아래로는 좌우에 붉은 탁자들이 있고 한쪽에는 활과 화살, 다른 쪽에는 술병이 놓여 있다. 활쏘기가 모두 끝난 후 잘 쏜 사람에게는 상으로 활과 화살이 내려졌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주가 내려졌다. 마지막 장면에는 벌주를 마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왕이 참석하는 국가적인 의례에서 벌주를 마시게 했다는 점이 다소 이채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대사례가 활쏘기를 통해 신분 질서를 확립하는 한편 화합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의식이었던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대사례에서 영조는 4발의 화살 중 3발을 적중시켰다. 서른명의 신하들 중에서 4발을 다 맞춘 사람이 다섯명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영조의 활쏘기 실력도 수준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왕들도 활쏘기 실력이 좋았다고 알려진 경우가 있는데 특히 정조(正祖ㆍ재위 1776~1800)는 “하늘에서 타고난 재주”라고 평가받을 정도였다. 왕이 행하는 활동들이 대개 그러하듯 활쏘기도 지나치면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겠지만, 심신의 수련과 무예의 권장이라는 명분을 잘 활용하면 정치적으로 유용한 도구였다. 정사를 돌보는 와중에서도 활쏘기 활동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 양녕대군이 생을 마쳤을 때 그의 졸기(卒記)에는 이러한 언급이 있다. “살림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활쏘기와 사냥으로 오락을 삼았다.” 태종으로부터 활쏘기 ‘조기 교육’을 받았던 양녕대군, 그의 활쏘기는 한낱 오락으로밖에 평가받지 못했다.

신재근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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