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9일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각본상, 감독상, 작품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4개 부문 수상작이 됐다.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음악가가 우승을 한 것과 같은 전율 흥분을 안겨다 준 사건이었다. 한편으론 여우주연상 러네이 젤위거에게도 관심이 갔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의 모습과 사뭇 달라서다. 젤위거는 ‘주디’에서 미국 배우 주디 갈런드를 연기했다. 바로 그 영화를 찾아봤다.
먼저 ‘주디 갈런드’는 누굴까.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인공 ‘도로시’를 맡았던 배우라면 모두 알 것이다. 주디 갈런드는 어린 나이에 영화계에 입문, '오즈의 마법사'를 통해 전세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 줬다.
하지만 그 주디 갈런드의 꿈과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영화 '주디'는 그의 불행했던 삶을 비춰주면서 바로 그 문제를 다뤘다. '주디'를 보고 나니 허수아비, 사자, 양철 인간 그리고 강아지 토토를 끔찍이 아끼던 천사 같은 도로시를,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게 됐다.
문득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에 나오는 문구가 떠오른다. 아사코와의 만남,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내겐 영화 '주디'가 그랬다. 이제 '오즈의 마법사'에서 예전의 순수한 감동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할 것 같다. 르네 젤위거가 주디 갈란트를 너무나 잘 연기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영화 주디를 추천하지 못 할 것 같다.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없다고 설명해야 할 막막함이랄까. 하지만 정말 그래야만 할까.
이런 종류의 막막함은 베토벤 곡을 연주할 때 만난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올해는 수많은 연주자가 베토벤을 연주한다. 베토벤은 언제 가장 힘들었을까. 청력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아니면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 그런 상황에서 쓴 곡들의 밝은 부분은 어떻게 연주되고 청중에게 전달되길 바랐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 내가 더 연구해야 할 과제다.
나는 감히 청중에게 베토벤의 불행했던 과거와 그의 청력 상실과 무관하게 베토벤 음악을 들어 보라고 제안하고 싶다. 오로지 선율에만 집중해 베토벤의 음악을 받아들여 보라는 것이다. 가끔 과장된 듯한 표정과 몸짓으로 베토벤의 음악을 포장하려는 연주자를 보곤 한다. 베토벤의 환희와 절망에 자신의 표정과 동작을 자꾸 집어넣는다. 이미 베토벤의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데 말이다. 문외한이라는 이유로 클래식을 어려워하는 이들이 있다. 가끔 그들의 생경함이 부럽다. 더 순수한 마음으로 베토벤, 쇼팽, 모차르트의 음악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 ‘맛있는 녀석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누굴까. 바로 지금 그들이 먹고 있는 맛있는 음식을 못 먹어본 사람이라고 한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도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 선우예권 오빠가 아닐지 모르겠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을 오늘 처음 들어 보는 사람, 바로 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