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서둘러라

입력
2020.08.03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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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고 그 열매를 거두는 사람이 있다. 그 둘은 대개 일치하지 않는다. 역사의 많은 인물들이 그러했다. 자기가 뿌린 씨의 과실을 자신이 수확하는 절대적인 행운은 세상에 없다. 누군가 세상에 홀연히 나타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 후에 사라지고, 영민한 후예는 이를 악보에 천천히 옮기면서 그 의미를 후대에 전한다. 이를테면 예수와 바울의 관계가 그러했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계가 그러했다.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도 씨를 뿌렸으되 스스로 역사적 결실을 거두지 못한 경우에 가깝다. 호모 사피엔스가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으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이야기하고, 또 책과 매체의 근대적 역사에서 구텐베르크를 항상 맨 앞에 호명하지만, 막상 그의 인생은 영광으로 가득 찬 승자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큰돈을 번 것도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큰 인정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송사에 휘말렸고 급속히 건강을 잃어 힘든 말년을 보냈다. 심지어 인쇄술의 결과물 또한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그리 큰 성취라고 말하기 어렵다. 저 유명한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180부 정도 제작되었을 뿐이었다. 구텐베르크가 뿌린 씨앗이 책이라는 형태로 본격적으로 피어난 것은 그가 성경을 인쇄한 1455년으로부터 약 50년 정도 이후의 일이다.

이 국면에서 가장 중요한 출판인은 이탈리아의 알두스 마누티우스이다. 산업으로서의 출판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구텐베르크 이후 2만종이 넘는 새로운 인쇄물들이 유럽의 곳곳에서 제작되었지만, 아직 대중적 책의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텐베르크가 독일의 마인츠에 뿌린 씨앗은 멀리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까지 날아와 출판인 마누티우스에 의해서 결실을 본 셈이다.

마누티우스는 1494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출판사 알디나를 설립하고 이듬해부터 상업적 단행본들을 세상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가 펴낸 책은 대략 130종을 넘긴다. 책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기는 대부분 그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대량 인쇄를 통해서 단행본을 제작한 것도, 개인이 구입할 수 있는 정도로 저렴한 책의 가격을 실현한 것도, 한 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는 판형의 책을 제작한 것도, 책에 담기는 텍스트의 성격에 따라 상이한 서체를 개발하여 적용한 것도, 출판사의 홍보용 출간 목록을 별도로 만든 것도, 그 모두가 마누티우스가 처음으로 한 일이다. 마누티우스에 의해서 책은 교회의 제단에서 가정의 식탁 위로 옮겨졌다.

출판사의 로고와 모토를 만든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마누티우스가 만든 출판사의 로고는 배의 닻을 돌고래가 감싸고 있는 모양을 지녔다. 닻은 신중함을 그리고 돌고래는 속도를 상징한다. 이는 출판사의 모토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그러니까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문장을 상징한다. 그는 천천히 서둘렀지만, 사실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에 이미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마누티우스의 닻과 돌고래 로고를 넣은 해적판이 제작되어 팔릴 정도였다. 그의 출판사는 1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까지 만들어 냈다. 그 비결은 오히려 '페스티나 렌테'에 있었다. 영혼을 끌어모아 대출을 받아 많은 인쇄기를 구비하고 일 년 내내 책을 제작해야 했을 것 같지만 마누티우스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스스로 고전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에라스무스 등 당대의 인문학자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여러 고전들의 텍스트를 세심하게 학문적으로 확정하는 일에 매달렸다. 창업 초기에는 고대 그리스어 원전들과 문법서를 출간했으며 이후 천천히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도서들을 목록에 추가했다. 그의 책은 독자들의 신뢰를 얻었고 그것은 다시 새로운 책을 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우리 시대에 모든 것이 격렬한 흐름 속으로 휘말리고 있다. 혁명이 일상화되었다. 4차 산업혁명의 뒤를 이어 코로나혁명과 뉴노멀혁명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그러나 혁명은 구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핵심은 혁신적 모범의 개발과 그 지속적 수행이다. 이를 위해 우리 시대 혁명에 마누티우스의 돌고래가 있는지, 그리고 닻이 있는지 살필 일이다. 천천히 하는 것과 서둘러 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느림은 오히려 속도가 갖추어야 할 규범이다. 천천히 서둘러야 한다.

김수영 철학박사ㆍ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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