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제서야" "얼굴 공개 안 하나"… 성폭력 피해자 상처 주는 질문

입력
2020.07.29 15:00
주변에 피해 말해도 묵살 일쑤
수사기관 外 증거 공개 불필요
얼굴 공개 땐 2차 피해 더 커질 수도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사건 이후 피해자를 향한 도를 넘는 비난이 일부 이어지면서 '2차 가해' 논란이 불붙고 있다. 유명인사가 연루된 성폭력 범죄가 발생하면 피해자를 비난하고 사건을 스캔들화하는 경우가 지속돼 왔는데, 이번에도 어김 없이 그런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2차 가해가 주로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의 특징과 권력형 성범죄 사건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건 당사자가 아닌 제3자는 가급적 피해자를 힘들게 하는 질문은 피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인식이 없을 경우 '평범한 사람들'도 언제든지 2차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이제서야 폭로하나" -직장 내 성폭력 몰이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으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수년간 침묵하다 왜 이제야 고소를 하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 뒤에는 종종 이런 말도 따라붙는다. ‘당신은 판단력과 대응할 만한 능력을 갖춘 어엿한 성인이지 않느냐.’

성폭력 피해 사건 무료법률 상담을 많이 해온 천정아 변호사는 "저런 질문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수직적 역학관계가 분명한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발언”이라며 “만약 피해자가 회장 부인이나 영부인이었다면 가해자가 감히 그런 짓을 했겠냐”고 반문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수직적 고용관계를 감안하면, 피해자는 가해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성인이 아니며, 권력을 쥔 상급자에 의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천 변호사는 특히 피해자들이 문제제기 없이 장기간 침묵하다가 갑자가 터뜨리는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공식적이지 않을 뿐 피해자는 주변에 반복해서 피해사실을 말하지만 묵살되기 일쑤"라며 "시끄럽게 하지 말고 참으라는 답변을 듣고 점차 문제제기할 힘을 잃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식적 문제제기는 '갑자기' 나온 행동이 아니라,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나온 자연스런 표출이라고 봐야 한다.


"구체적인 증거를 밝혀라"-수사기관도 요구 안 해

유명인사가 가해자로 지목된 성추행 사건에서 피해자를 향해 가장 많이 가해지는 질문은 "주장밖에 없지 않느냐. 증거를 대라"는 것이다. 박원순 전 시장 사건 직후에도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구체적 증거를 밝히라”는 반박 글이 넘친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피해자를 불신하는 이 같은 시각에 대해 “전제가 잘못됐다. 눈을 가린 채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 위원은 “성희롱과 성범죄 사건은 대부분 폐쇄회로(CC)TV가 없는 곳,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데 어떻게 증거가 온전히 존재하겠냐”며 “법적으로도 객관적 증거가 명백해 처벌된 사례는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성폭력 사건의 이 같은 특징을 잘 아는 수사기관과 법원도 피해자 진술 이외에 많은 증거자료를 요구하지 않고, 대부분의 사건도 정황증거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명백한 증거가 존재하더라도 이를 외부에 공개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장 위원은 “성폭력 사건은 민감하고 프라이버시 문제가 걸려 있어, 공개하면서 진행하면 안 된다. 수사기관도 피해자의 신상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명조서를 활용하고 재판도 비공개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사실이라면 얼굴을 공개해라"-피해자 후유증 키우기만

2018년 서지현 검사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김지은씨는 TV에 출연해 미투 운동에 불을 지폈다. 이런 잔상 때문인지, 박원순 전 시장의 성폭력 사건이 불거졌을 때 적지 않은 이들이 피해자를 향해 “얼굴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요구에 대해 전문가들은 피해자의 공개 여부는 '맞고 틀리다'의 문제로 접근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성폭력 피해자는 다른 범죄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사생활을 존중 받아야 하며, 추가 피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얼굴과 이름을 밝힐 경우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 여성들은 대다수가 2차 피해를 겪는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김지은씨는 지난 24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노동자로서의 삶을 걸고 미투를 해야만 했고, 살기 위해 또 다른 의미의 죽음을 선택해야 했다”며 얼굴을 공개한 이후 극심한 압박과 부담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장다혜 위원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쪽에선 조사나 수사과정에서 밝혀진 여러 사실들을 피해자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얼굴이 공개될 경우 후유증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믿고 싶은 대로 보는 것

진영 논리가 갈수록 공고해지면서 성폭력 사건조차 정치적 해석을 담아 재단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가해자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쪽에서 '폭로한 배경에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 게 대표적이다. 평소 행실이 훌륭하고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활동을 해온 유명인사의 소식을 접하면 '그런 일을 저질렀다니 믿고 싶지 않다' 또는 ‘그런 행동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다' 등의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이 여기서 더 나아가면 정치 공작이라고 믿게 된다. 장다혜 위원은 "이는 믿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고, 이해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려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 정치적으로 쟁점화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박원순 전 시장 사건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법원 판단을 받고 법적 책임을 졌으며, 오거돈 전 부산시장은 사건 초기 당사자에게 사과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두 사건 모두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실관계를 밝힐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박 전 시장 사건은 조사할 기회 자체가 없었기에 고인 죽음에 대한 책임과 원망이 뒤섞여 나오는 모양새"라고 분석했다.



박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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